당쟁과 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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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쟁과 사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 횡행하면서 여러 당파가 공존하며 공론을 유도하는 붕당의 원칙이 무너져갔다. 숙종 때 다시 집권한 서인은 곧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분열도 전혀 정책적인 대립이 아닌,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송시열)와 소장파(윤증)의 파벌적 대립이었다.
이후 서인은 장희빈에게서 난 왕자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쫓겨나고 한 때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기사환국, 숙종 16년, 1689년) 그러나 왕의 마음이 장희빈에게서 왕비(인현왕후)에게로 돌아가자 다시 서인이 집권했다. 이후 남인의 대부분은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갑술환국 , 숙종 21년, 1694년)
신구 정치세력의 대립, 복제 문제를 둘러싼 정치세력 사이의 분쟁, 왕비와 후궁 쪽으로 나뉘어진 붕당간의 싸움 등으로 이어져 온 붕당정치는 다시 왕과 그 형제, 혹은 왕과 왕자 사이의 대립을 계기로 계속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소론이 경종을 두둔한 반면 노론은 그의 아우 영조를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이 집권했고(1721년), 경종이 단명하여 영조가 즉위했을 때에는(1725년)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3. 붕당정치의 긍정적 측면
붕당정치는 학연과 지연을 매개로 의식과 정치이념을 같이하는 당인들끼리 붕당을 이루고, 언론활동을 통해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형태이다. 그것은 여론을 앞세운 것으로서 비판세력이 공존하며, 특정 붕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산림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할 수 있어 건전한 정치풍토를 조성하였다.
4. 붕당정치의 문제점
붕당정치가 변질되어, 극단적인 정쟁과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아자, 세력균형 위에서 안정될 수 있었던 왕권 자체가 불안하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당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명분을 이용하는 병폐가 나타났으며 권력의 지속적인 독점을 위해 상대 당을 철저하게 궤멸시키는 현상이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서인이 재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격렬하게 진행되어, 여러 붕당의 의견이 대립 조정되는 가운데 공론을 형성한다는 사림정치의 명분이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노론 외척 일당에 의한 세도정치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민란이 빈발하였던 데 비하면, 견제와 비판으로 집권당의 실정을 방지하는 붕당정치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일반화되면서 의리와 도덕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명분론과 허례에 빠져들었다. 또한 반대 당에 대한 포용성이 결핍되어 조선의 사회, 문화는 차츰 탄력성과 개방성을 잃어갔다.
■ 사화와 붕당정치의 공통점과 차이점
사화와 붕당정치는 다같이 양반지배층의 분열대립이고, 성리학의 이념적 차이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간에 벌어진 정치투쟁이며, 붕당정치는 사림파간의 정치투쟁이라는 점에서 구별되고, 사화는 일시적이었으나 붕장정치는 혈연ㆍ지연ㆍ문벌ㆍ학벌과 연결되어 장기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사화는 중앙이 무대였고, 붕당정치는 중앙과 지방(서원ㆍ족장ㆍ농장)이 무대였다.

키워드

훈구파,   사림파,   붕당,   당쟁,   시화,   성리학,   관학,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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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4.05.29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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