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인(桓仁)시대와 구석기문화
2. 한웅(桓雄)시대와 신석기문화
1) 한웅과 웅호족의 관계
2) 신시(神市)의 위치 비정
3) 한웅시대의 거점 검토
3. 단군(檀君)시대와 청동기문화
2. 한웅(桓雄)시대와 신석기문화
1) 한웅과 웅호족의 관계
2) 신시(神市)의 위치 비정
3) 한웅시대의 거점 검토
3. 단군(檀君)시대와 청동기문화
본문내용
이삭이 맺혔다. -
라는 매우 타당성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당시의 밭농사로는 보리(麥)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오늘날 종자의 개량과 기술의 발달로 한 포기당 25개이상의 이삭이 맺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덟개의 이삭’은 당시의 수확으로서 대단히 현실감 있는 표현인 것이다. 25대단군 솔나(率那) 조에도 ‘밭곡식이 풍년이 들어 한 포기당 5개이삭의 조(粟)가 맺혔다’는 기사도 있다.
[단군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기록은 금속기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삼성기]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치우천왕이 ‘동두철액(銅頭鐵額)’하고 ‘채광주철(採鑛鑄鐵)’하여 병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역년이 기원전 2천7백년에서 2천5백년 사이의 일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중국에서의 금속기 사용시기는 기원전 2천년경부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연대는 본격적으로 청동기가 용구로 사용되어진 시기가 아니고 청동기가 묻힌 유적의 연대를 의미한다. 청동기가 예기화되어 무덤에 안장되기 시작한 연대와 발명되어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연대와는 상당한 시기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홍산문화에서와 같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동물형상의 옥기(玉器)같은 것은 금속공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학계에서는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라 하여 이미 기원전 3천년이전에 극히 일부나마 동기(銅器)의 사용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의 [사기(史記)]에서도 치우천왕이 '동두철액(銅頭鐵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기록에서의 동(銅)과 철(鐵)은 금속에 대한 같은 표현일 것으로 보아진다. 이는 문헌기록이 철기(鐵器)의 본격적인 사용이후의 것이므로 기록상의 혼동이 야기될 수 있음을 감안하여, 기록상으로는 동양에서는 동이족(東夷族)의 수장 치우천왕이 최초로 금속기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신시본기’에는 치우천왕이 갈로산에서 쇠(金)을 캐내어 병기를 만들었고 옹고산(雍孤山)에서는 냇가나 하천에서 걸러서 채집하는 수금(水金)과 철광석을 녹여 채집하는 석금(石金)을 개발하였다고 되어있는데, 각 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불명확하지만 중국의 동부지역이나 동북지역 어는 한 곳인 것으로 생각된다.
치우천왕 이후에 나타나는 금속기에 관한 기사는 단군조선 전기에 등장하는데 [단군세기] 10대단군 노을(魯乙) 조에 보면,
- 병오16년(B.C.1935) 발해연안에서 金塊가 노출되었는데 수량이 13石이었다. -
라고 되어 있어, 여기서 노출된 금괴가 황금을 뜻하는 것인지 일반적인 금속덩어리를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발해연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발해연안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전개지이고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중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靑銅:Bronze)의 전단계에 나타나는 순동(純銅:Copper)으로 만든 패식 2점이 발견되었다. 붉은 색을 띤 순동이 약해서 주석과 같은 광물질을 첨가하여 경도가 높은 청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초기단계의 순동이 대성산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외에도 내몽골 적봉현 하가점촌 하층유적에서 4개의 동련사(銅煉渣:제련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기원전 1천9백년대의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성산은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일 것이므로 기원전 2천년대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중국내륙의 청동기 유적인 하남성(河南省) 언사현(偃師縣) 이리두(二里頭)유적의 기원전 1천7백년경보다 훨씬 빠른 연대이다.
한편, 중국서북지역 감숙성의 제가문화(齊家文化)에서도 다양한 동기(銅器)가 출토되었는데 기원전 2천년대의 문화단계에 속해 이 지역에서도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기에 이미 동기가 출현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청동기의 개시에 대해서는 중원중심이 아닌 오히려 주변지역에서 먼저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함이 옳다. 다만, 중원의 큰 잠재력에 의해 청동기문화가 만개하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청동문화를 꽃피운 이들이 바로 이주해 간 동이(東夷) 계통의 은민족(殷民族인) 것이다.
초기 청동기유적에 속하는 당산시 대성산은 발해연안에 있으며 진시황이 세운 장성의 기점인 갈석산(葛石山)에 가깝다. 갈석산은 ‘갈산(葛山)’으로도 불리어졌는데, 치우천왕이 금속을 캐낸 갈로산(曷蘆山)이 아닐까? 치우천왕의 본거지가 이 일대를 포함하는 청구국이므로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단군세기]의 ‘발해연안’은 어느 곳인지 지칭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발해서북안 일대의 기원전 2천년전후의 청동유적이 시기적으로 기록과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단군세기] 15대단군 벌음(伐音) 조(條)에 보면,
- 기축10년(B.C.1652) 帝께서는 西쪽으로 弱水에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金鐵 및 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 -
라는 금속기 사용에 대한 세번째 기록이 전해진다. 약수(弱水)는 단군조선시대에만 하더라도 서요하(西遼河)와 연결된 내몽골 동부지대를 흐르는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을 지칭하였었다. 단군이 아사달이 있는 만주 송화강지역에 있었다고 본다면 약수는 북쪽에 있지 않고 이 당시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약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단고기]상에서도 두 곳을 혼용하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위의 기사는 시라무렌강 일대에서 금속기의 원료(金鐵이란 일반적인 명칭사용)를 채취하였다는 것인데, 바로 이 지역 임서(林西) 대정(大井)에서 노천채광지가 발견되었다. 구리(銅)를 채광하고 제련, 주조까지 행한 흔적이 남아 있는 하가점하층문화단계의 청동기시대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기를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후의 하가점상층문화단계까지 연결되고 있다. B.C.1652년 벌음(伐音) 단군 때 행하여진 구리의 채광기사는 시기적으로나 위치상으로나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학적 발굴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위에서 본 단군시대의 두가지 사실이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입각하여 쓰여졌다고 주장할 사람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고고학과의 일치성은 [단군세기]에 대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더욱 더 부여해 주고 있다.
라는 매우 타당성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당시의 밭농사로는 보리(麥)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오늘날 종자의 개량과 기술의 발달로 한 포기당 25개이상의 이삭이 맺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덟개의 이삭’은 당시의 수확으로서 대단히 현실감 있는 표현인 것이다. 25대단군 솔나(率那) 조에도 ‘밭곡식이 풍년이 들어 한 포기당 5개이삭의 조(粟)가 맺혔다’는 기사도 있다.
[단군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기록은 금속기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삼성기]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치우천왕이 ‘동두철액(銅頭鐵額)’하고 ‘채광주철(採鑛鑄鐵)’하여 병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역년이 기원전 2천7백년에서 2천5백년 사이의 일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중국에서의 금속기 사용시기는 기원전 2천년경부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연대는 본격적으로 청동기가 용구로 사용되어진 시기가 아니고 청동기가 묻힌 유적의 연대를 의미한다. 청동기가 예기화되어 무덤에 안장되기 시작한 연대와 발명되어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연대와는 상당한 시기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홍산문화에서와 같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동물형상의 옥기(玉器)같은 것은 금속공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학계에서는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라 하여 이미 기원전 3천년이전에 극히 일부나마 동기(銅器)의 사용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의 [사기(史記)]에서도 치우천왕이 '동두철액(銅頭鐵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기록에서의 동(銅)과 철(鐵)은 금속에 대한 같은 표현일 것으로 보아진다. 이는 문헌기록이 철기(鐵器)의 본격적인 사용이후의 것이므로 기록상의 혼동이 야기될 수 있음을 감안하여, 기록상으로는 동양에서는 동이족(東夷族)의 수장 치우천왕이 최초로 금속기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신시본기’에는 치우천왕이 갈로산에서 쇠(金)을 캐내어 병기를 만들었고 옹고산(雍孤山)에서는 냇가나 하천에서 걸러서 채집하는 수금(水金)과 철광석을 녹여 채집하는 석금(石金)을 개발하였다고 되어있는데, 각 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불명확하지만 중국의 동부지역이나 동북지역 어는 한 곳인 것으로 생각된다.
치우천왕 이후에 나타나는 금속기에 관한 기사는 단군조선 전기에 등장하는데 [단군세기] 10대단군 노을(魯乙) 조에 보면,
- 병오16년(B.C.1935) 발해연안에서 金塊가 노출되었는데 수량이 13石이었다. -
라고 되어 있어, 여기서 노출된 금괴가 황금을 뜻하는 것인지 일반적인 금속덩어리를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발해연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발해연안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전개지이고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중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靑銅:Bronze)의 전단계에 나타나는 순동(純銅:Copper)으로 만든 패식 2점이 발견되었다. 붉은 색을 띤 순동이 약해서 주석과 같은 광물질을 첨가하여 경도가 높은 청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초기단계의 순동이 대성산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외에도 내몽골 적봉현 하가점촌 하층유적에서 4개의 동련사(銅煉渣:제련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기원전 1천9백년대의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성산은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일 것이므로 기원전 2천년대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중국내륙의 청동기 유적인 하남성(河南省) 언사현(偃師縣) 이리두(二里頭)유적의 기원전 1천7백년경보다 훨씬 빠른 연대이다.
한편, 중국서북지역 감숙성의 제가문화(齊家文化)에서도 다양한 동기(銅器)가 출토되었는데 기원전 2천년대의 문화단계에 속해 이 지역에서도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기에 이미 동기가 출현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청동기의 개시에 대해서는 중원중심이 아닌 오히려 주변지역에서 먼저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함이 옳다. 다만, 중원의 큰 잠재력에 의해 청동기문화가 만개하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청동문화를 꽃피운 이들이 바로 이주해 간 동이(東夷) 계통의 은민족(殷民族인) 것이다.
초기 청동기유적에 속하는 당산시 대성산은 발해연안에 있으며 진시황이 세운 장성의 기점인 갈석산(葛石山)에 가깝다. 갈석산은 ‘갈산(葛山)’으로도 불리어졌는데, 치우천왕이 금속을 캐낸 갈로산(曷蘆山)이 아닐까? 치우천왕의 본거지가 이 일대를 포함하는 청구국이므로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단군세기]의 ‘발해연안’은 어느 곳인지 지칭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발해서북안 일대의 기원전 2천년전후의 청동유적이 시기적으로 기록과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단군세기] 15대단군 벌음(伐音) 조(條)에 보면,
- 기축10년(B.C.1652) 帝께서는 西쪽으로 弱水에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金鐵 및 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 -
라는 금속기 사용에 대한 세번째 기록이 전해진다. 약수(弱水)는 단군조선시대에만 하더라도 서요하(西遼河)와 연결된 내몽골 동부지대를 흐르는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을 지칭하였었다. 단군이 아사달이 있는 만주 송화강지역에 있었다고 본다면 약수는 북쪽에 있지 않고 이 당시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약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단고기]상에서도 두 곳을 혼용하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위의 기사는 시라무렌강 일대에서 금속기의 원료(金鐵이란 일반적인 명칭사용)를 채취하였다는 것인데, 바로 이 지역 임서(林西) 대정(大井)에서 노천채광지가 발견되었다. 구리(銅)를 채광하고 제련, 주조까지 행한 흔적이 남아 있는 하가점하층문화단계의 청동기시대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기를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후의 하가점상층문화단계까지 연결되고 있다. B.C.1652년 벌음(伐音) 단군 때 행하여진 구리의 채광기사는 시기적으로나 위치상으로나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학적 발굴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위에서 본 단군시대의 두가지 사실이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입각하여 쓰여졌다고 주장할 사람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고고학과의 일치성은 [단군세기]에 대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더욱 더 부여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