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 유교 사상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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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序論
Ⅱ. 高句麗의 儒敎 思想
Ⅲ. 百濟의 儒敎 思想
Ⅳ. 新羅의 儒敎 思想
Ⅴ. 結論

본문내용

그리고 이때 儒學은 老莊學과 함께 활용되었음도 알 수 있다.
진평왕 22년 원광 법사가 귀국하여 花郞의 世俗五戒를 지었는데, 오계는 <忠, 孝, 信, 勇, 慈>의 덕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儒敎와 佛敎를 종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善德女王 9년에 唐나라의 國學에 유학생을 보내 고구려, 백제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眞德女王 4년에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자신이 지은 五言詩太平頌을 지어 무늬를 놓아 김법민으로하여 唐 高宗에게 바치게 하였다.
진덕여왕은 김인문을 唐나라에 보내어 그대로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삼국시대를 지나 신라 통일기로 접어들면, 强首와 薛聰같은 六頭品 계층의 유학자가 활약하고, 國學이 설립되어 고급 관리들이 배출되는 모습으로 유교가 전개된다. 이때의 國學을 통한 고급 관료층의 발생은 특히 진덕여왕 5년(651)에 설치된 執事部 등 정치기구의 발전과 짝한 것으로 '전제 왕권의 공고화'를 뜻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유학자의 역할을 육두품이 담당하였음은 바로 유교에 입각한 왕권의 공고화가 신라적인 특수한 여건에 맞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원래 유교는 본래 忠孝를 중심 이념으로 한 가부장적 왕권 전제 체제를 시인하는 사상 체계이므로 자연히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화에 응용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한편 당시 육두품은 진골보다 낮은 귀족이었던 만큼, 관료가 되어 왕권에 결합한다는 사실은 곧 骨品制的 제약을 극복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고려해야 할 것은 설총이 <諷王書>를 지어, 국왕에 대한 수양 내지 도덕적 권위를 강조한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바로 유교의 정치 이상이 德治, 禮治에 있음을 국왕에게 주지시킴으로써, 그 덕치, 예치를 어느 정도 지향한 자취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유교는 이 시기에서부터 체제는 물론 그 정치 이념의 구현을 위한 시각에서 응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하대 또는 말기에 이르면, 유교계의 상황은 최치원을 비롯한 渡唐 儒學者들, 특히 宿衛學生들의 활동이 대표한다. 도당 유학생은 이미 앞선 시대에도 있었지만, 그 수와 활동에 있어 이 시대의 숙위 학생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숙위 학생들은 대체로 육두품 계층에 속하며, 신분적으로 反眞骨的이면서도 동시에 反豪族的 입장이어서, 결국 전제 왕권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의 경화된 골품제 사회의 폐쇄성 앞에서는 무력한자들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에 오면, 유교는 골품제 질서에 반발하여 새 사회 질서를 수립하려는 의욕을 표면화시키는 시대 정신의 뒷받침을 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신라는 삼국 통일 이전에는 유, 불, 도의 사상이 서로 융합했으나, 통일을 전후해서 强首, 薛聰 등이 유학을 전공하였고, 崔致遠에 이르러 儒敎, 佛敎, 道敎를 兼合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Ⅴ. 結論
삼국 시대의 시대적 의의는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는 시기로 국가의 이념적, 윤리적 기초를 마련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원시 신앙과 단군신화를 기반으로 유학, 불교, 도교 및 음양 사상을 융합하던 시대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유교는 정치 사회 및 교육과 같은 일상 생활을 위한 규범적 문화적 기반 조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고, 불교와 도교는 백성들의 안심입명을 위한 종교 생활 및 예술 활동의 영역을 확충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高句麗는 太學을 설립하여 역사상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유교 경전을 주된 교육 내용으로 하여 사회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태학 설립이 갖는 의미는 유교 사상의 핵심이 윤리 사상인 점을 생각할 때, 단순한 인재 양성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 생활 규범과 백성들의 윤리적 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한데 그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유학 사상은 공자를 중심으로 하나 위진 남북조의 현학과 경학을 가미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百濟는 학문, 사상의 발전상을 통해 당시 문화적, 윤리적 삶의 수준을 추측해 볼 수 있고, 특히 [論語]와 같은 유교 경전에 능숙한 학자를 배출하고 그것을 아직기와 왕인 등이 일본에 전하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新羅는 유교와 불교의 덕목을 혼합한 규범을 실천한 花郞制度로 보아도 유교의 당시 형편에 대해 추측이 가능하고, 최치원의 진감국사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신라 사람들은 불교, 유교, 다른 종교에 대해 함께 공부한 것으로 보아 진리 앞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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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8.02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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