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균전제의 성립과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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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있는데, 그는 언어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고대사회의 발전과정의 대계를 찾는 동시에 그 사회발전의 단계성동 아울러 파악한다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위당이나 민세와 동시기에 이들과 더불어 민족사학의 또 다른 일각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호암(湖岩) 문일평 이었다. 그의 역사연구는 민족사학의 역사인식의 입장에서 행하여진 것이었고, 민족사학의 우리 역사 체계화를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서 수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역사서술은 민중계몽을 위하여 탁월함을 나타내었다. 그는 자신의 역사학을 완전히 소화하여 간이한 문체로 서술할 수가 있었고, 높은 수준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를 이해하기 쉬운 역사로 기술하고 있었다. 호암의 역사학은 민중의 계몽이라는 점, 역사의 대중화라는 점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는 것이었다.
3. 결론
이때까지의 민족사학에는 위와 같이 위당, 민세, 호암 등이 각각 개별적인 역사서술을 보이며 크게 활동하였으나, 철저한 민족위식의 바탕 위에 세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되는 것이었다. 하지마 이들의 이 무렵의 활동이 민족사학의 학적인 성과를 망라한 우리 역사의 대계를 체계화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개별연구는 많이 하였으나 통사의 체계화에 있어서는 아직 아무도 이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각 학파의 학문적인 성과를 광범하게 흡수하면서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결할 수 있는 새로운 학적인 체계를 세우는 일을 수행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40년대에 활약하게 되는 홍이섭, 남창 손진태, 학산 이인영 등이 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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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8.10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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