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본의 내정간섭과 갑오개혁
(2) 집강소 설치과정
(2) 집강소 설치과정
본문내용
지방관의 유무와 관계없이, 농민군이 막강한 세력을 바탕으로 집강소를 장악하고 치안기능을 넘어 사실상 통치권을 행사한 지역이다. 전봉준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있던 전주와 금구ㆍ태인, 김개남이 강대한 무장력으로 장악하고 있던 남원과 임실, 손화중의 세력기반지로서 6월 하순 척왜 봉기를 일으킨 무장, 그리고 고창과 흥덕은 상세한 설명이 필요없는 그 대표적인 지역이다. 또한 김방서가 황등(黃登)에 대도회소(大都會所)를 두고 여러 접주에게 이리(裏里)ㆍ 나포(羅浦) ㆍ대장촌(大場村) ㆍ춘포(春浦) 등에 회소를 나누어 사무를 보게 했던 익산, 6월 하순에 금구ㆍ 김제 ㆍ옥구 등지에서 온 농민군과 함께, 그리고 7월 초순에 웅포(熊浦)의 농민군과 함께 강력한 척왜(斥倭) 봉기를 일으켰던 함열도 이러한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밖에 차치구가 지휘하던 정읍, 고부농민봉기 때로부터 김도삼 ㆍ정익서가 이끌어오던 고부 등 상당수의 지역도 여기에 해당되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이 지역들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주는 자료가 없어 단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둘째, 농민군의 세력이 우세하지만 지배권력과 협조관계에 있던 지역으로, 순창이 이에 해당한다. 순창은 군수 이성렬(李聖烈)을 위협하는 김개남 휘하의 접주 남응삼(南應三)을 순창 집강 이사문(李士文)이 막고 나섰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군과 지배세력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농민군의 세력이 미약하여 집강소가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거나 보수지배층이 집강소를 장악하고 치안기능을 담당한 지역이다. 집강소가 설치되었다가 곧바로 폐지된 무주,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한 7월에 민보군을 조직하고 김개남의 진입을 거부했던 장수, 농민군과 보수지배층 사이에 마찰을 겪다가 8월경에 민보군이 득세하는 용담 등이 그러한 예이다. 7-8월간 민보군이 조직된 흔적이 있는 진안도 이러한 곳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넷째, 농민군이 조직되지 않거나 세력이 매우 약하여, 보수지배층이 처음부터 집강소의 설치조차 거부했던 지역이다.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 세력이 막강했던 운봉이 이에 해당한다. 운봉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동안 농민군에게 한 번도 점령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9월 재봉기 때 정부군이나 일본군의 지원이 전혀 없는 가운데 남원의 농민군을 격파할 만큼 민보군 세력이 강성했던 곳이다. 운봉처럼 민보군을 조직하고 농민군에게 완강하게 저항했던 지역으로는 전남 나주가 있다. 농민군은 이곳을 7-8차례나 공략했지만 실패했다. 또 전봉준이 김학진이 발급한 협조문서를 가지고 직접 찾아가 집강소체제에 협조하는 문제로 담판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이상에서 지금의 전북에 해당하는 군현을 대상으로 집강소의 기능에 따라 분류하여 보았다. 하지만 사실 이들 지역 가운데서도 집강소의 내용이 확실치 않은 적지 않다. 또한 고산ㆍ김제ㆍ만경ㆍ부안ㆍ여산ㆍ옥구ㆍ용안ㆍ임피는, 집강소와 관련하여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직 잘 모르는 상태이다. 불과 100여년전의 사건이 이렇게 잊혀져 왔던 것이다.
둘째, 농민군의 세력이 우세하지만 지배권력과 협조관계에 있던 지역으로, 순창이 이에 해당한다. 순창은 군수 이성렬(李聖烈)을 위협하는 김개남 휘하의 접주 남응삼(南應三)을 순창 집강 이사문(李士文)이 막고 나섰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군과 지배세력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농민군의 세력이 미약하여 집강소가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거나 보수지배층이 집강소를 장악하고 치안기능을 담당한 지역이다. 집강소가 설치되었다가 곧바로 폐지된 무주,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한 7월에 민보군을 조직하고 김개남의 진입을 거부했던 장수, 농민군과 보수지배층 사이에 마찰을 겪다가 8월경에 민보군이 득세하는 용담 등이 그러한 예이다. 7-8월간 민보군이 조직된 흔적이 있는 진안도 이러한 곳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넷째, 농민군이 조직되지 않거나 세력이 매우 약하여, 보수지배층이 처음부터 집강소의 설치조차 거부했던 지역이다.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 세력이 막강했던 운봉이 이에 해당한다. 운봉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동안 농민군에게 한 번도 점령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9월 재봉기 때 정부군이나 일본군의 지원이 전혀 없는 가운데 남원의 농민군을 격파할 만큼 민보군 세력이 강성했던 곳이다. 운봉처럼 민보군을 조직하고 농민군에게 완강하게 저항했던 지역으로는 전남 나주가 있다. 농민군은 이곳을 7-8차례나 공략했지만 실패했다. 또 전봉준이 김학진이 발급한 협조문서를 가지고 직접 찾아가 집강소체제에 협조하는 문제로 담판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이상에서 지금의 전북에 해당하는 군현을 대상으로 집강소의 기능에 따라 분류하여 보았다. 하지만 사실 이들 지역 가운데서도 집강소의 내용이 확실치 않은 적지 않다. 또한 고산ㆍ김제ㆍ만경ㆍ부안ㆍ여산ㆍ옥구ㆍ용안ㆍ임피는, 집강소와 관련하여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직 잘 모르는 상태이다. 불과 100여년전의 사건이 이렇게 잊혀져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