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연구방법과 검증의 문제점
Ⅲ. 국내학계의 반응
1. 긍정론
2. 불신론
3. 수정론
Ⅳ. 사료의 비판
1. 津田左右吉
2. 前間恭作․太田 亮
3. 今西 龍
4. 三品彰英․池內 宏․末松保和․井上秀雄
Ⅴ. 최근 기년조정안에 대한 반증
Ⅵ. 결론
Ⅱ. 연구방법과 검증의 문제점
Ⅲ. 국내학계의 반응
1. 긍정론
2. 불신론
3. 수정론
Ⅳ. 사료의 비판
1. 津田左右吉
2. 前間恭作․太田 亮
3. 今西 龍
4. 三品彰英․池內 宏․末松保和․井上秀雄
Ⅴ. 최근 기년조정안에 대한 반증
Ⅵ. 결론
본문내용
많이 실시하였고, 영토보존과 확장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생시에 禪位한 유일의 왕이었다. 그리고 이 칭호들은 삼국시대 중기까지는 삼국 어느나라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제까지 살펴본 견해와 전혀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末松保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있는 신라시초의 즉위개국년인 B.C. 57년부터 514년까지 571년동안 증거사료에 의하여 신라가 한 국가로서 역사상으로 활동한 때를 추구하면 나머지 150년이 개국기가 된다.’고 하였다. 다른 일인보다도 개국기를 늦고도 길게 잡았던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번 정리해보면, 그는 개국기를 150년으로 잡았으며, 개국기를 17대 내물왕으로 잡으면서도 동시에 이 시기를 반전설 반역사적 시기로 잡았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는 23대 법흥왕 이후를 역사시대로 봤던 것이다. 여기서 末松保和가 가장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말살하려고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끝으로 井上秀雄의 견해로는 고구려본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대해서만 자기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도 역시 신라 상대의 기록은 조작, 가필, 새로운 조작기사로 보고 17대 내물왕부터 역사시대로 보았던 것이다.
Ⅴ. 최근 기년조정안에 대한 반증
기년조정안에서 신라왕들의 재위기간과 기사를 이동시킨다는 것은 『삼국사기』「신라본기」뿐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신라와 고구려, 백제 관계 기사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응하며 기년도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대응이 되지 않는 기사라 해도 신라 - 고구려관계 기사에서는 눌지왕 34년에 해당하는 기사가 장수왕 38년이 아니라 28년으로, 신라 - 백제관계 기사에서는 개루왕 38년이 아니라 28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정도이다. 이 정도 차이는 한자의 획 하나를 잘못 기입한 정도로, 기년을 수백년에서 수십년을 옮겨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기년조정안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백제는 물론 고구려의 왕력과 기년까지 신라의 왕력과 기년에 맞추어 같이 조정해야 한다. 이 방법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지니게 되는데, 백제왕력과 기년은 『일본서기』기년 조정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조정한다는 것은 기존에 인정되어 왔던 『일본서기』초기기록의 2주갑 조정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해야 함은 물론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되어야한다. 고구려의 왕력과 기년을 조정하는 것은 더욱 큰 부담인데, 고구려와 관련된 중국의 기년까지 조정해야 하는 연쇄적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신라본기」의 기년만 조정하고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의 기년은 정확하다고 간주한다면 그것이 신라관계기사만 엉뚱한 왕의 재위연대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된다. 또 삼국관계 기사가 어느 시점에 일어났는지도 불분명한 것으로 인정하고 만다면 앞으로 사료들을 기반으로 삼국관계를 비롯한 주변세력과의 관계사를 연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사실 『삼국사기』가 이렇게까지 조작되었다는 점은 증명되기 어려운 것이며 그것이 증명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기사의 전면적 불신론만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년조정은 「고구려사기」나 「백제사기」는 물론 『일본서기』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의 기년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Ⅵ. 결론
삼국사기 초기기사의 이해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기년조정이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4세기 이후 삼국사기 기년을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모순이 입증되는 4세기 이전의 초기기록 까지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의 내용까지 전폭적으로 조작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쉽게 단언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3세기 이전의 삼국사기 초기기록도 임의로 전반적인 연대를 조정하기는 어렵다. 사료들 사이에 시간적인 모순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기년 자체를 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의 기년 조정안들에서는 이러한 신중함을 발견하기 어려우며, 불확실한 전제나 오차가 많은 수치를 기반으로 하여 여타 사료와의 비교를 통한 반증을 무시해버린 채, 일반적으로 기년을 조정해 버린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기년조정이 삼국사기 중에서도 신라본기에만 일방적으로 가해져 있는 것도 문제인데 4세기 신라사의 기년을 조정한다면 고구려나 백제사는 물론 중국사와 일본사의 기년까지도 조정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료계통이 다른 동아시아 역사 전체가 이렇게까지 일관되게 조작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4세기를 중심으로 한 기년은 조정이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료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기사 하나하나에 대한 철저하고도 입체적인 검증이 필요한 것이지 일방적인 기년조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연구자의 편의에 따라 사료구조를 바꾸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또한 일인 학자들처럼 삼국사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폄하한 의견이 다수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일본의 고대를 찬란히 기록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저항이 될 수 있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조작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은 일인들의 연구에 있어서는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학자들 가운데서도 이 의견에 동조하는 학자가 많았다는 점, 즉 불신론이 대체적인 입장이라는 점은 많은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일본서기를 하나의 성스러운 경전으로 신봉하는 이상 일본인에게는 그것을 ‘求眞的’으로 연구할 자격이 없으며 한국고대사, 고대한일 관계사와 같은 과목을 연구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실정이다. 앞으로 삼국사기 초기기사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일인의 목적에 의해서 우리측 사료의 가치를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막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년조정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사료자체의 올바른 연구를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으로 末松保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있는 신라시초의 즉위개국년인 B.C. 57년부터 514년까지 571년동안 증거사료에 의하여 신라가 한 국가로서 역사상으로 활동한 때를 추구하면 나머지 150년이 개국기가 된다.’고 하였다. 다른 일인보다도 개국기를 늦고도 길게 잡았던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번 정리해보면, 그는 개국기를 150년으로 잡았으며, 개국기를 17대 내물왕으로 잡으면서도 동시에 이 시기를 반전설 반역사적 시기로 잡았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는 23대 법흥왕 이후를 역사시대로 봤던 것이다. 여기서 末松保和가 가장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말살하려고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끝으로 井上秀雄의 견해로는 고구려본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대해서만 자기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도 역시 신라 상대의 기록은 조작, 가필, 새로운 조작기사로 보고 17대 내물왕부터 역사시대로 보았던 것이다.
Ⅴ. 최근 기년조정안에 대한 반증
기년조정안에서 신라왕들의 재위기간과 기사를 이동시킨다는 것은 『삼국사기』「신라본기」뿐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신라와 고구려, 백제 관계 기사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응하며 기년도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대응이 되지 않는 기사라 해도 신라 - 고구려관계 기사에서는 눌지왕 34년에 해당하는 기사가 장수왕 38년이 아니라 28년으로, 신라 - 백제관계 기사에서는 개루왕 38년이 아니라 28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정도이다. 이 정도 차이는 한자의 획 하나를 잘못 기입한 정도로, 기년을 수백년에서 수십년을 옮겨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기년조정안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백제는 물론 고구려의 왕력과 기년까지 신라의 왕력과 기년에 맞추어 같이 조정해야 한다. 이 방법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지니게 되는데, 백제왕력과 기년은 『일본서기』기년 조정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조정한다는 것은 기존에 인정되어 왔던 『일본서기』초기기록의 2주갑 조정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해야 함은 물론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되어야한다. 고구려의 왕력과 기년을 조정하는 것은 더욱 큰 부담인데, 고구려와 관련된 중국의 기년까지 조정해야 하는 연쇄적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신라본기」의 기년만 조정하고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의 기년은 정확하다고 간주한다면 그것이 신라관계기사만 엉뚱한 왕의 재위연대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된다. 또 삼국관계 기사가 어느 시점에 일어났는지도 불분명한 것으로 인정하고 만다면 앞으로 사료들을 기반으로 삼국관계를 비롯한 주변세력과의 관계사를 연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사실 『삼국사기』가 이렇게까지 조작되었다는 점은 증명되기 어려운 것이며 그것이 증명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기사의 전면적 불신론만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년조정은 「고구려사기」나 「백제사기」는 물론 『일본서기』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의 기년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Ⅵ. 결론
삼국사기 초기기사의 이해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기년조정이라는 문제는 그 자체로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4세기 이후 삼국사기 기년을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모순이 입증되는 4세기 이전의 초기기록 까지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의 내용까지 전폭적으로 조작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쉽게 단언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3세기 이전의 삼국사기 초기기록도 임의로 전반적인 연대를 조정하기는 어렵다. 사료들 사이에 시간적인 모순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기년 자체를 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의 기년 조정안들에서는 이러한 신중함을 발견하기 어려우며, 불확실한 전제나 오차가 많은 수치를 기반으로 하여 여타 사료와의 비교를 통한 반증을 무시해버린 채, 일반적으로 기년을 조정해 버린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기년조정이 삼국사기 중에서도 신라본기에만 일방적으로 가해져 있는 것도 문제인데 4세기 신라사의 기년을 조정한다면 고구려나 백제사는 물론 중국사와 일본사의 기년까지도 조정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료계통이 다른 동아시아 역사 전체가 이렇게까지 일관되게 조작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4세기를 중심으로 한 기년은 조정이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료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기사 하나하나에 대한 철저하고도 입체적인 검증이 필요한 것이지 일방적인 기년조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연구자의 편의에 따라 사료구조를 바꾸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또한 일인 학자들처럼 삼국사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폄하한 의견이 다수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일본의 고대를 찬란히 기록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저항이 될 수 있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조작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은 일인들의 연구에 있어서는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학자들 가운데서도 이 의견에 동조하는 학자가 많았다는 점, 즉 불신론이 대체적인 입장이라는 점은 많은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일본서기를 하나의 성스러운 경전으로 신봉하는 이상 일본인에게는 그것을 ‘求眞的’으로 연구할 자격이 없으며 한국고대사, 고대한일 관계사와 같은 과목을 연구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실정이다. 앞으로 삼국사기 초기기사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일인의 목적에 의해서 우리측 사료의 가치를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막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년조정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사료자체의 올바른 연구를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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