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는 말
제 1장."야웨-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제 2장."사람"과 "실존"과의 관계
별도 연구: 기도에 대해서
별도 연구: "시간과 역사"
제 3장."실존"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제 4장.예수 그리ㅡㅅ도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
제 1장."야웨-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제 2장."사람"과 "실존"과의 관계
별도 연구: 기도에 대해서
별도 연구: "시간과 역사"
제 3장."실존"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제 4장.예수 그리ㅡㅅ도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
본문내용
서 실현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일방적인 독백이 아인 것이다. 신앙이 있는 곳에 비로소 하나님은 자신을 주신다. 신앙이란 "나"가 실현되는 자의식으로서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내 자신에게서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들어가기 위해 나온 것이다. 즉 인간의 자의식은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신앙은 부르심이고 소명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계시와 신앙은 항상 동시적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동시에 "내가 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같은 순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 없이는 계시도 없다. 우리에게 계시가 일어나는 않는 것은 바로 우리가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명이며 과제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은 죽는 존재이지만 이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아니라면 그는 이미 죽어 버린 존재이고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죽어갈 것이다.
제 4 장: 예수 그리스도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가장 분명하고 실재적인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또한 그 분을 닮아가야 하는 과제를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기독교적인 인간", 즉 "사람"의 가장 분명한 원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이다. 즉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하나님의 "너"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에게서 "사람"의 실제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을 항상 "상대" 앞에서 세우면서 생겨나는 "세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의 인간성은 처음부터 인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세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실재성은 어차피 자신을 상대 앞에서 부단히 세우며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이런 인간에게는 예수는 감추어져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기의 세계관으로 예수를 파악하려고 하면 예수는 감추어진 비밀이 된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고백에서 기초한다. 고백은 상대가 실재함을 믿는 것이다. 신앙이 아니면 예수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없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실은 예수는 다른 인간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수와 인간의 차이는 예수는 "세계"를 가지고 있는 않다는 사실이다. 세계란 우리의 세계이며 그 근원은 상대로 실재하는 하나님 앞에서 부단히 자신을 세우려는 노력으로 세계를 세운다. 세계란 결국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나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우는데서 생겨나는 세계가 없었다.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다. 즉 하나님의 "너"가 되면 거기에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로 살고자 하신 인격이었다. 예수는 스스로 자기의 뜻을 행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으로 살고자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은 항상 "나"로 실재하셨다. 예수는 그 하나님에게 '당신으로 인해 사는 존재'였다.
예수의 자아에게서 인간의 창조극원의 실재성을 발견한다.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이 거하도록 자신을 비우는 것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존재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아", 즉 "자의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의식은 항상 나로 실재하는 존재, 즉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나"가 인간 자아에 일어나는 삶이야말로 기독인이 추구해야 하는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 분명하다.
우리의 의식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아의식이다. 세계를 가지기 때문에 자신을 "상대" 앞에서 스스로를 세우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 본성은 에로스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인간의 의식은 에로스적인 의식이다. "상대"를 만나면 항상 자신을 고집하며 세우려는 본성을 가진다. "무의미"란 "의미"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동시에 "의미"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생의 의미로 일어나지 않을 때 인간은 생에 대한 질문이나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은 항상 의미와 무의미와의 갈등 속에 놓여있다. 의미란 인간이 인간의 실재성, 즉 "사람"을 체험할 때 일어나며 그것은 세계가 원래 자신의 존재의 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함으로 주어진다. 존재의 의미가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생은 "의미"로 일어난다. "실존"이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인간 정신의 표현이다. 이것은 세계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뿌리이고 비록 세계가 주는 자양분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려는 인간의 실날 같은 생명의 욕구에서 기인된다. 실존은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나마 하나님으로 인해 살고 싶은 실날 같은 욕구의 표현이다. 실존은 생명과 구원의 확실한 증표가 아니라 단지 세계 안에서 이미 죽은 자신을 발견하고 살고자 애쓰는 하나의 정신의 노력에 불과하다.
인간은 세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자라며 거기의 사유를 배우며 결국 거기에 대해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세계가 없고 오로지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은 인과율로 풀 수 없는 하나의 신비에 해당된다. 어떻게 십자가의 통증을 그는 생명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는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에 사는 우리는 이런 것을 우리의 세계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가지는 독특한 인간성의 신비한 면이다. 예수의 인간성이 가지는 신비한 이 점 때문에 부득불 그의 인간성을 신성과 관련지으려는 여러 신학적인 노력들이 오히려 정당하게 보인다.
제 4 장: 예수 그리스도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가장 분명하고 실재적인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또한 그 분을 닮아가야 하는 과제를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기독교적인 인간", 즉 "사람"의 가장 분명한 원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이다. 즉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하나님의 "너"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에게서 "사람"의 실제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을 항상 "상대" 앞에서 세우면서 생겨나는 "세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의 인간성은 처음부터 인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세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실재성은 어차피 자신을 상대 앞에서 부단히 세우며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이런 인간에게는 예수는 감추어져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기의 세계관으로 예수를 파악하려고 하면 예수는 감추어진 비밀이 된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고백에서 기초한다. 고백은 상대가 실재함을 믿는 것이다. 신앙이 아니면 예수와 야웨-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없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실은 예수는 다른 인간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수와 인간의 차이는 예수는 "세계"를 가지고 있는 않다는 사실이다. 세계란 우리의 세계이며 그 근원은 상대로 실재하는 하나님 앞에서 부단히 자신을 세우려는 노력으로 세계를 세운다. 세계란 결국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나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우는데서 생겨나는 세계가 없었다.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다. 즉 하나님의 "너"가 되면 거기에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로 살고자 하신 인격이었다. 예수는 스스로 자기의 뜻을 행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으로 살고자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은 항상 "나"로 실재하셨다. 예수는 그 하나님에게 '당신으로 인해 사는 존재'였다.
예수의 자아에게서 인간의 창조극원의 실재성을 발견한다.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이 거하도록 자신을 비우는 것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존재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아", 즉 "자의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의식은 항상 나로 실재하는 존재, 즉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나"가 인간 자아에 일어나는 삶이야말로 기독인이 추구해야 하는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 분명하다.
우리의 의식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아의식이다. 세계를 가지기 때문에 자신을 "상대" 앞에서 스스로를 세우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 본성은 에로스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인간의 의식은 에로스적인 의식이다. "상대"를 만나면 항상 자신을 고집하며 세우려는 본성을 가진다. "무의미"란 "의미"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동시에 "의미"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생의 의미로 일어나지 않을 때 인간은 생에 대한 질문이나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은 항상 의미와 무의미와의 갈등 속에 놓여있다. 의미란 인간이 인간의 실재성, 즉 "사람"을 체험할 때 일어나며 그것은 세계가 원래 자신의 존재의 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함으로 주어진다. 존재의 의미가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생은 "의미"로 일어난다. "실존"이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인간 정신의 표현이다. 이것은 세계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뿌리이고 비록 세계가 주는 자양분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려는 인간의 실날 같은 생명의 욕구에서 기인된다. 실존은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나마 하나님으로 인해 살고 싶은 실날 같은 욕구의 표현이다. 실존은 생명과 구원의 확실한 증표가 아니라 단지 세계 안에서 이미 죽은 자신을 발견하고 살고자 애쓰는 하나의 정신의 노력에 불과하다.
인간은 세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자라며 거기의 사유를 배우며 결국 거기에 대해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세계가 없고 오로지 "나"로 실재하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은 인과율로 풀 수 없는 하나의 신비에 해당된다. 어떻게 십자가의 통증을 그는 생명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는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에 사는 우리는 이런 것을 우리의 세계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가지는 독특한 인간성의 신비한 면이다. 예수의 인간성이 가지는 신비한 이 점 때문에 부득불 그의 인간성을 신성과 관련지으려는 여러 신학적인 노력들이 오히려 정당하게 보인다.
추천자료
체게바라가 나에게 미친 영향
베카리아와 범죄와 형벌의 기본사상
도덕적 사유의 기초로서 윤리의 두 유형
페스탈로치
외국 대안 교육의 내용과 현실
바울의 신학사상
[인간윤리]사형제도에 대한 이해와 찬반론
[교육사회학] 페스탈로치에 대해서
슈타이너의 유아 교육 사상
[인간][인간공학][인간공학의 발전과정][인간공학의 주 연구 분야][인간공학의 정보처리 원동...
[발도르프 프로그램] 역사적배경과 교육론 및 교수학습법, 교육원리, 발전방향 제시
인간과 교육에 대해서
[문학교육론] 청소년 문학의 개념과 특징 - 청소년 문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 발견적 개념인 ...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