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절 역사적 배경과 시대개관
제 2절 고려의 왕립음악기관
1. 대악서
2. 관현방과 아악서
3. 왕립음악기관의 활동 범위
제 3절 고려의 향악기와 향악
1. 고려시대의 향악기
2. 고려시대의 향악
제 4절 고려의 당악과 당악기
1. 고려의 당악과 당악정재
2. 고려의 당악기와 송의 교방악사
제 5절 대성아악의 등장과 그 방향
1. 대성아악의 아악기와 악현
2. 대성아악의 역사적 변천
제 6절 고려의 고취악과 기악
1. 고려 고취악의 연주형태
2. 고려의 기악과 잡기
제 2절 고려의 왕립음악기관
1. 대악서
2. 관현방과 아악서
3. 왕립음악기관의 활동 범위
제 3절 고려의 향악기와 향악
1. 고려시대의 향악기
2. 고려시대의 향악
제 4절 고려의 당악과 당악기
1. 고려의 당악과 당악정재
2. 고려의 당악기와 송의 교방악사
제 5절 대성아악의 등장과 그 방향
1. 대성아악의 아악기와 악현
2. 대성아악의 역사적 변천
제 6절 고려의 고취악과 기악
1. 고려 고취악의 연주형태
2. 고려의 기악과 잡기
본문내용
다.
제 6절 고려의 고취악과 기악 : 고려의 고취악이 고려시대에 비롯된 것이 아님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 의해서 입증된 사실이다. 간단한 타악기와 관악기로 연주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취악이 238년 백제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음이 보인다. 당시 고구려에서 북 요 같은 타악기와 소 각 같은 관악기로 연주된 고취악이 임금의 행렬에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고려의 고취악이 예전처럼 국왕의 행차 때와 군대의 행진 때에도 사용되었음은 물론이고 그 이외 국가적 행사에도 쓰였다.
1. 고려 고취악의 연주형태 : 법가 위장의식의 경우 임금의 수레앞에 취각군사 20명이 뒤 따랐고, 취라군사 24명이 뒤따랐으며, 연등위장에는 취각군사 16명, 취라군사24명, 팔관위장의 경우에 취각군사 30명, 취라군사30명이 뒤따랐다. 노부의식의서 연주되었을 고취악의 형태는 위장의식의 것과 약간 다른 듯하나 행악 계통의 음악일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리고 임금의 수레 앞과 뒤에 따르면서 고취악을 연주했던 취각군사나 취라군사의 전통이 조선 초기의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로 전승되었으리라고 지적되었다. 그렇지만 고취악의 음악적 성격이 고려의 향악과 당악 중에서 어느 계통의 음악에 속하는지는 앞으로 연구해 볼 만한 과제로 남는다.
2. 고려의 기악과 잡기 : 고려사회에서 성장한 공연예술의 한 작은 갈래가 있으니, 바로 기악과 잡기이다. 기악과 잡기는 여러 가지 명칭들이 시사하듯이 모두 노래 춤 음악 재주 등의 종합적 놀이로 이루어진 종합공연예술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음악사 이외 연극사나 무용사에서도 중요시되고 있다.
1) 고려 기악과 잡기의 전통 : 고려의 기악과 잡기가 주로 공연된 경우는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는 가례인 팔관회와 연등이고 두 번째, 흉례인 나례의식이며, 셋째는 기타 궁중의식이다. 고려의 기악과 잡기는 11세기 경부터 민간연예인에 의해서 세속화된 공연예술로 변질 되었고, 그 결과로 잡극기 기악잡기 가무잡기 백회잡기 백회가무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기악과 잡기의 전통은 통일신라가무의 유풍을 전수받은 터 위에 새로운 형태의 놀이 종목을 추가하여 발전시킨 종합공연예술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고려 기악고 잡희는 본래 탈춤 이외 정재, 땅재주, 줄타기 등 여러 가지 공연종목으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후대의 종합공연예술의 발전에 모체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잡기의 창우와 경시서의 여기 : 창우는 고래사회에서 천인 출신의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곡예같은 재주를 부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창우들은 양수척 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잡기의 공연과 관련되었을 창우와 여기의 등장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음악연주활동의 새로운 향수층으로 등장한 고려와 외국상공인들의 오락적 요구를 위하여 직업적인 연예인의 출현은 음악 무용 연극 등과 같은 공연예술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으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제 6절 고려의 고취악과 기악 : 고려의 고취악이 고려시대에 비롯된 것이 아님은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 의해서 입증된 사실이다. 간단한 타악기와 관악기로 연주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취악이 238년 백제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음이 보인다. 당시 고구려에서 북 요 같은 타악기와 소 각 같은 관악기로 연주된 고취악이 임금의 행렬에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고려의 고취악이 예전처럼 국왕의 행차 때와 군대의 행진 때에도 사용되었음은 물론이고 그 이외 국가적 행사에도 쓰였다.
1. 고려 고취악의 연주형태 : 법가 위장의식의 경우 임금의 수레앞에 취각군사 20명이 뒤 따랐고, 취라군사 24명이 뒤따랐으며, 연등위장에는 취각군사 16명, 취라군사24명, 팔관위장의 경우에 취각군사 30명, 취라군사30명이 뒤따랐다. 노부의식의서 연주되었을 고취악의 형태는 위장의식의 것과 약간 다른 듯하나 행악 계통의 음악일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리고 임금의 수레 앞과 뒤에 따르면서 고취악을 연주했던 취각군사나 취라군사의 전통이 조선 초기의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로 전승되었으리라고 지적되었다. 그렇지만 고취악의 음악적 성격이 고려의 향악과 당악 중에서 어느 계통의 음악에 속하는지는 앞으로 연구해 볼 만한 과제로 남는다.
2. 고려의 기악과 잡기 : 고려사회에서 성장한 공연예술의 한 작은 갈래가 있으니, 바로 기악과 잡기이다. 기악과 잡기는 여러 가지 명칭들이 시사하듯이 모두 노래 춤 음악 재주 등의 종합적 놀이로 이루어진 종합공연예술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음악사 이외 연극사나 무용사에서도 중요시되고 있다.
1) 고려 기악과 잡기의 전통 : 고려의 기악과 잡기가 주로 공연된 경우는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는 가례인 팔관회와 연등이고 두 번째, 흉례인 나례의식이며, 셋째는 기타 궁중의식이다. 고려의 기악과 잡기는 11세기 경부터 민간연예인에 의해서 세속화된 공연예술로 변질 되었고, 그 결과로 잡극기 기악잡기 가무잡기 백회잡기 백회가무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기악과 잡기의 전통은 통일신라가무의 유풍을 전수받은 터 위에 새로운 형태의 놀이 종목을 추가하여 발전시킨 종합공연예술이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고려 기악고 잡희는 본래 탈춤 이외 정재, 땅재주, 줄타기 등 여러 가지 공연종목으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후대의 종합공연예술의 발전에 모체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잡기의 창우와 경시서의 여기 : 창우는 고래사회에서 천인 출신의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곡예같은 재주를 부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창우들은 양수척 출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잡기의 공연과 관련되었을 창우와 여기의 등장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음악연주활동의 새로운 향수층으로 등장한 고려와 외국상공인들의 오락적 요구를 위하여 직업적인 연예인의 출현은 음악 무용 연극 등과 같은 공연예술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으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