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피카소의 창조성과 그의 성격
2. 작품변화를 통해 본 피카소의 심리 변화
1) 청춘시대
2) 실험시대
3) 변화의 시대
4) 50년대 이후시대
3. 피카소와 초현실주의
참고 문헌
2. 작품변화를 통해 본 피카소의 심리 변화
1) 청춘시대
2) 실험시대
3) 변화의 시대
4) 50년대 이후시대
3. 피카소와 초현실주의
참고 문헌
본문내용
다. 이 그림에서는 색채 패턴과 선적 리듬이 강력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것은 한 편의 시적인 작품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소녀는 단지 좌우가 바뀐 반사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예언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 서정적인 작품 은 그의 청색시기, 장미빛 시기 그리고 고전적 이상주의 시기의 서정을 부활시키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마티스가 그렸던 이국적 오달리스크에 기묘함이라는 차원을 추가하고 있으며 브라크의 작품에서 늘 나타나는 화실 장면을 예고하고 있다. 1930년대 피카소의 대표작이자 20세기의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은 《게르니카》이다. 1937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 특히 스페인 파시스트 정권을 지원했던 독일 폭격기가 게르니카라는 바스크족 마을을 파괴한데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피카소는 처음부터 그 분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1920년대 말 이래로 무의식적으로 이 그림과 같은 발언을 준비해 오고 있었다. 《게르니카》의 일부 형태들은 1925년의 <세 명의 무희들>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1930년경 그는 그리스도 수난상에 대한 습작들을 수없이 그렸다. 뛰어난 소품 《십자가 형》은 그 중 가장 신중한 작품으로서 이젠하임 제단화를 되돌아 보게 하고 게르니카를 예상케 하는 고통스러운 고뇌를 담고 있다. 조각가의 작업실을 그린 1933년의 에칭 연작들 ― 후에 볼라르가 한 벌로 묶은 ― 에서 고대 크레타의 황소 머리에 사람 몸통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형상이 처음으로 등장하며, 그 후의 판화에서는 미노타우로스가 주로 주인공이 되었다. 1933년에 피카소는 특히 잔인한 투우 장면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 작품들은 피카소의 개인적 삶에 있어서의 갈등을 반영한 것으로 그래픽 작품 《미노타우로마키아》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거기에는 피카소의 삶과 스페인에서 의 지난 날, 특히 고야에 대한 그의 회상을 상기시켜 주는 많은 형상들 ― 창문가의 여인들, 사다리 위의 그리스도 같은 인물, 꽃과 촛불을 든 소녀, 젖가슴을 드러낸 채로 죽어 있는 여인을 싣고 가면서 울부 짓는 말, 마구잡이로 길을 더듬어 나가고 있는 미노타우로스 ― 이 나타나 있다. 피카소의 도상법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차지하는 위치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힘의 상징 혹은 스페인의 상징일 수도 있고 때로 그것이 피카소 자신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게르니카>에선 말할 것도 없고 이처럼 재현적인 작품에서조차 특수한 문학적 상징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피카소는 공포나 연민의 감정을 보편화된 감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한 정서들을 문학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피카소는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공화파의 진영에 서서 활동했다. 1937년 1월 그는 <프랑코의 환상과 기만>이라는 시에 나오는 수많은 일화로 구성된 에칭을 제작했다. 프랑코는 대형 회중시계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그리고 황소는 재기하는 스페인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1937년 5월과 6월에 피카소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 관에 전시하기 위해 대작 <게르니카> 를 그렸다. 그것은 공포와 파괴를 담은 장면으로 검은색, 흰색, 회색으로 된 거대한 그림이다. 이러한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경험 전부를 동원하였다. 비록 그가 1920년대 자신의 초현실주의적 왜곡으로부터 끌어낸 울부짖는 말이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물 같은 소재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구조는 큐비즘적인 격자패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작품은 이미 제작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강력하게 표현주의를 큐비즘 에 적용시킨 것이다. 아마 <게르니카>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수백 점의 스케치와 드로잉들이 그려졌을 것이다. 이 작품이 피카소 자신에게 준 영향은 그 후 몇 십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잠시 동안 의 평온한 시기에서조차도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는 깊은 혼란이 드러나 있다. 비록 그는 독일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별로 시달림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그림과 조각들은 자신의 비통함을 드러내고 있다. 해골이라는 테마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색채는 어둡고 불협화음적이며 왜곡은 극단적이고 강박적이 된다. 단지 자신의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만 그의 유머와 감상이 이따금씩 되살아 나고 있을 뿐이다. 파리의 해방은 그에게 구김살 없는 쾌활한 그림들을 그리게 했다. 예를 들어 《생의 환희》은 마티스가 1905년부터 1906년까지 그린 작품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또한 피카소는 평면적인 색면과 곡선적인 윤곽의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산들바람에 풍성한 머리와 풍만한 젖가슴을 흔들거리면서 경쾌하게 발끝으로 춤을 추는 님프 주위에서 심각한 표정의 켄타우루스들이 피리를 불고 있으며 장난스러운 염소들이 뛰놀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피카소가 그처럼 열성을 쏟았던 목가적 그림의 전통에 대한 탁월한 풍자이다. 종전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피카소는 회화, 조각, 세라믹, 판화등에서 자신의 놀라운 에너지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 옛 거장들의 작품을 개작한 작품들은 그 자신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와 그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피카소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푸생, 루카스 크라나크, 벨라스케스, 들라크르와 ― 모두 색채, 구성, 착상등에서 뛰어난 작가들 ― 의 작품들을 자유롭게 변형시킨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이 경탄할 만한 스페인 거장은 마지막으로 에너지를 극적으로 분출하여 거리낌없이 에로틱한 표현주의로 치달았다. 그 표현주의는 결코 힘의 약화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1980년대의 신표현주의를 예고하듯 정신과 형식 모두가 앞으로 도약하는 것이었다.
참고 문헌
【 피카소의 사랑과 예술 】, 마리로드 베르타다크, 폴 뒤 부셰 , 책세상
【 피카소의 작품을 통해 본 그의 창작심리 】, 박영배(경희대 석사 논문)
【 동아세계대백과사전 】, 도서출판 동아
【 피카소의 예술세계 】, 청천 문화예술문고
【 피카소/브라크/레제 】, 계몽사
【 현대 미술의 개념 】, 니코스 스탠고스 , 문예 출판사
【 피카소 】, 피에르 덱스 , 열화당
참고 문헌
【 피카소의 사랑과 예술 】, 마리로드 베르타다크, 폴 뒤 부셰 , 책세상
【 피카소의 작품을 통해 본 그의 창작심리 】, 박영배(경희대 석사 논문)
【 동아세계대백과사전 】, 도서출판 동아
【 피카소의 예술세계 】, 청천 문화예술문고
【 피카소/브라크/레제 】, 계몽사
【 현대 미술의 개념 】, 니코스 스탠고스 , 문예 출판사
【 피카소 】, 피에르 덱스 ,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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