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근세사 과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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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근세사 과제2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등홍파, 남민수 『서원과 이학의 일원화』
민족문화논총28집, 2008


(3) 『송명이학에 있어서 서원의 의의』
안동학 연구 제11집 111p ~ 147p , 2012


(4) 결론

본문내용

元─黨禁 1195∼1200)” 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196년에 한탁주가 정권을 잡은 후, 이학을 위학으로 배척하여,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엄하게 금지하였으며 반드시 “위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해야지만 관리가 되고 승진할 수 있었고, “위학을 하지 않음”을 증명하여야만 과거 시험에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렇게 냉엄한 정세에서, 이학과 이학의 근거지인 서원은 더더욱 냉대를 받게 되었다. 서원은 이학과 함께 영고성쇠를 같이 하였으며 경원당금으로 인해 곤경에 빠졌으니, 이것은 사정의 한 국면이다. 정치적 압박과 학술적 전횡은 일시적으로 서원과 이학의 발전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의 압박과 위협으로 인해 이학과 서원이 더욱 깊게 융합되고, 역량을 집중하고 양자를 동일시하게 되어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와 축적된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겁 많은 이학 선비들이 의관을 바꾼 것을 통해 우리는 이학의 중견 학자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강한 세력에 의해 억압받은 것이 아니며 여전히 이학과 서원 사업은 발전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곽진(郭津 922 ~ 979)이 서원을 세우는 등 사람들이 이학과 서원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학예를 전수하게 하여 위난을 만난 이학이 명맥을 유지하게 하였다. 1202년에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해 경원당금령이 해제되고, 이학에 대한 통치자의 태도가 확연히 호전되었다. 1220년에는 건순시대의 이학자들이 끊임없이 강조하고 주장하였던 “학통(學統)”은 마침내 조정의 정식 승인을 얻게 되고 그들 자신도 문묘의 주요 학통으로 배열되었다. 당금이 풀리게 되자 이학의 근거지인 서원 역시 통치자의 중시를 받게 되었다. 그 증거로 영종(寧宗1195~1224) 가정 년간에 복건 푸젠성 ( Fujian , 福建省 복건성) , 중국의 남동부, 타이완[臺灣] 해협에 면하는 성.
(福建) 건양 젠양 (Jianyang , 建陽 건양) , 중국 푸젠성[福建省] 난핑[南平]에 있는 시(市).
(建陽)의 운장서원과 강서 남창 난창 (Nanchang , 南昌 남창) , 중국 장시성[江西省]의 성도(省都).
(南昌)의 동호서원에 황제가 사액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후 이학과 서원은 함께 신속한 회복과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종(理宗 1225~1264)과 도종(度宗 1265~1274) 시기에 관학과 사학의 두 역량이 밀접하게 협력하고 위아래가 마음을 합쳐 이학과 서원이 함께 번영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정주(程朱)이학 성리학.
은 마침내 노력의 결과를 얻게 되었고 관학의 전통적 사상 지위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종(理宗 1225~1264)은 적극적으로 서원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황제의 사서와 사액을 얻는 것은 일찍이 주희가 여러모로 추구하였던 서원 건설의 목표로 사서와 사액이 이학에 대한 조정의 지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40여 곳의 사액서원은 11개성에 분포되어 보기 좋은 진영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곧 조정 최고 권려그이 서원에 대한 확호한 지지를 의미하고 있다.
정부와 서로 호응하여 백성들의 서원에 대한 지지는 더욱 높아졌다. 이 시기는 비록 이학을 집대성한 한 시대의 큰 스승이 세상을 떠난 지 몇 해가 지났지만 그들의 제자와 문인들은 모두 선현을 계승, 학문을 강구하였고 스승의 견해를 제창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이학이 정부의 철학이 되었으며 서원을 세우고 이학을 전수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게 하였다.
남송 후기에는 서원을 세워서 이학을 전파하는 것이 이미 그 당당한 기세를 막을 수 없는 사회문화의 주류가 되었고 서원과 이학이 일원화 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서원을 세우고 서당을 세우며 <四書>에 주를 달고 어록을 모으는 등등 비교적 공정적인 행위 유형으로 변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 흐름의 주도와 행위 유형의 추진 속에서 서원과 이학의 공통적 변영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민간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러한 문화 주도와 행동 양식이 조정의 장기적 제창과 지지를 얻었을 때 그것이 서원의 발전을 가져왔다.
남송 때 이학자의 대부분은 서원에 대해 매우 깊은 서원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이는 북송의 이학자들이 서원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낳았던 상황과 사뭇 다르다. 남송 전기에는 호굉(胡宏 1106 ~ 1161)은 남에게 책망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벽천서당을 벽천서원으로 바꾸고 많은 사람을 모아서 강학한 경우가 있다. 남송 후기에는 위료웅이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외친 것은 이학의 전통적인 지위를 쟁취하는 동시에 곳곳에 여러 유학자들이 강학하기 위한 서원과 사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또한 그도 서원을 세워 강학 활동에 몰입하였다.
주·장·여의 후학들만 이렇게 하였을 뿐 아니라 육문(陸門)의 후학들도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이 홀로 학문에 힘쓰는 경향을 완전히 바꾸어 서원건설에 힘썼다. 육문의 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강렬한 서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완전히 서원에 의탁하게 되어 서원을 “선현들의 행동을 배우고 후대의 학자를 갈고 닦는” 정신적 귀의처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각 파의 이학자들이 서원에 의자하면서 강학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각 학자의 학파 중 이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서원 콤플렉스를 가장 엄격했다. 먼저 역사서에 근거 하면 주희(朱熹, 1130 ~ 1200)와 연관된 서원은 약 67곳이다. 주희가 창건한 곳이 4곳, 수리 복원 시킨 곳이 3곳, 공부한 곳이 6곳, 강학한 곳은 20곳, 예전에 강학하고 후대의 사람이 창건한 곳은 21곳, 제시를 지어 적은 곳은 7곳, 기념하는 글과 편액을 적은 곳은 6곳이다. 두 번째로는 주희의 주요 이학 저작은 그가 모두 창건한 서원에서 완성되었다. 세 번째로는 백록동서원에 대한 심취는 규정을 위반하여 세울 정도에 이르렀다.
서원이 서재와 다른 점은 지식인 공공의 활동 장소라는 것이다. 서원이 존재하면서부터 서원과 지식인 사이의 쌍방향 선택이 생겼다. 하나는 지식인이나 학자로서 어떤 서원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에 일종의 가늠자가 생겨 마음에 들면 들어가고 맞지 않으면 나온다. 다른 하나는 서원 역시 적극적으로 선비들을 머무르게 하거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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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6
  • 저작시기2013.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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