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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를 만들어 자신들의 사관으로 사서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두 사서의 차이는 체재나 서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전체가 인물 중심의, 열전이 주가 되는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사에 비해 세가의 비중이 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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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韓氏)로 택했다고 하는데
이가 곧 위숙 왕후(威肅王后)였다.
세조는 송악산 옛 집에 여러 해 살다가 또 새 집을
그 남쪽에 건설했는데 그 터는 곧 연경궁 봉원전(延慶宮奉元殿) 터이다.
그때에 동리산(桐裏山)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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싣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려사≫ 찬자들이 쓴 유일한 사론이 세계 말미에 붙여졌다. 또한, 조칙과 상소문은 그 내용을 분류해 각 지에 싣고 나머지는 세가와 전에 실었다는 원칙과 유가(儒家)의 문집과 잡록의 사적 중 내용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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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는 송나라와 빈번한 교류와 아울러 많은 중국 서적이 들어왔다. 《고려사세가》에는 6대 성종 9년(990)에 修書院을 두었고, 9대 현종 18년(1027)에는 송나라 강남인 李文通 등이 597권의 서적을 바쳤고, 선종 3년(1086)에는 王弟 釋煦가 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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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 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건국을 합리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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