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회화의 사실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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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찬란한 위업을 남긴 조선 후기의 회화
2. 사회 변동기 화가의 신분과 사회적 갈등
3. 18세기의 회화 동향 -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4. 19세기의 회화 동향 - 화단의 보수화와 사실주의의 퇴조
5. 재창조할 민족회화의 전범은 18세기에서

본문내용

수준으로 장기를 내세우며 개성미를 풍기려 한 화가들도 있었다. 남계우(南啓宇)의 섬세한 채색풍 나비그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묵란도, 석연(石然) 양기훈(楊基薰)의 노안도(蘆雁圖),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의 괴석도(怪石圖),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의 난초와 대나무 그림 등이 그 사례이다.
이상 19세기 회화에서 근대로의 분수령에는 구한말 장승업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주체의식은 현실감이나 시대정신과 거리가 있는 복고풍에 머물렀지만, 뛰어난 표현기량으로 묘사력을 진척시켰다. 그의 회화사적 위상은 조선 후기 회화를 20세기 초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을 통하여 근현대 회화로 연결시키는 교량이라는 점이다.
근대사가 시작되는 구한말 회화의 특징은 서울 중심에서 탈피하여 그림의 수요 증가에 따라 각 지역의 특성을 바탕으로 한 지역화단의 형성에 있다.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허련 일파나 평양의 양기훈과 김윤보(金允輔) 등의 활약은 낡은 회화형식에 머물러 있지만, 나름대로 중앙문화에서 벗어나려 한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민화에 지역적 개성이 두드러지는 점과 함께 당시 안성의 방짜유기, 해주나 고장의 도자기, 강화나 평양의 반닫이, 충무 장, 나주 소반 등 지역경제와 특성에 기초한 민간공예의 융성과도 같이하는 것이다.
또한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항거가 지속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시대상황에 부응한 회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우리 근대사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근대미술의 출발로서 무엇보다 중요하면서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고, 회화적 수준이 떨어져 관심에서 멀어진 채이지만 김준근(金俊根)과 김윤보의 풍속도, 채용신(蔡龍臣)의 항일지사 초상화와 기록적 성격의 그림, 이도영(李道榮)의 신문삽화 등이 있다. 이들에게서 당시 사회현실의 풍자나 민족애가 담긴 근대적 경향성을 읽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위정척사파로서 한계를 갖지만 항일 의병장들의 절개있는 서화도 따져보아야 할 과제이다. 국권회복이 급선무였던 당대의 민족현실과 관련지어서 말이다.
5. 재창조할 민족회화의 전범은 18세기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8세기에 이룩된 우리 회화의 고전적 전형은 19세기에 오면서 흐트러졌다. 그러나 근대회화로의 변모를 전혀 예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의 성과를 토대로 한 회화 수준의 유지나 시민계급으로 성장할 문화적 향수층의 새로운 생활감정과 취미, 보수성과 봉건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형성, 지역특성을 살린 지역화단과 공예문화의 융성, 반외세 투쟁에 나선 항일지사들의 서화기풍 등 한계가 있지만 그나마 근대성을 이끌어낼만한 자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으로말미암아 자주적 발전이 저지되고, 식민지를 경험하며 그 성과와 한계를 명확히 진단하면서 올곧게 계승하지 못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18세기 회화의 사실주의 정신이 근대적 성과로 전승되지 못한 아쉬움은 크다. 오히려 봉건적 보수성이 강한 서화가이며 화론가로서 독창성이 결여된 김정희와 그 일파가 일제 강점기 이후 과대포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는 식민지 지배 강화를 위해 기존의 보수세력을 이용하는 제국주의의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한편 20세기 이후 우리의 현대 사실주의는 서구 조형론에 밀려 조선 후기 회화와 정상적으로 조응하지 못하였다. 서양 회화를 배운 작가들은 전통형식을 무시하고 배척한 채 서구의 것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신사조를 뒤쫓기에 급급하였고, 전통회화는 왜색조에 물들거나 현대감을 실어내는 데 역부족이었다.
우리의 근현대회화사가 남긴 뼈저린 교훈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부터 순탄치 않았던 근현대회화사의 흐름을 보면, 우리가 모색해야 할 민족회화의 방향은 자명해진다. 조선후기, 그것도 18세기 회화의 견실한 창조정신과 현실감, 그리고 예술성이 재창조의 핵심일 것이다. 18세기 회화가 지닌 예술적 매력과 우리 시대와의 친근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조선풍의 주체의식과 개성적 독창성으로 우리식 사실주의의 한 전범을 이루었음을 볼 때 그러하다.
또 19세기 이래 근현대가 그런 18세기 회화의 민족정서와 시대정신을 방치해 온 탓으로, 더욱이 식민화한 문화가치의 혼돈 속에서 그 역사적 유산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일은 민족회화의 자주선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근현대미술에 대한 반성과 함께 18세기 회화의 형식미에 대한 재검토는 우리 시대의 민족회화를 튼실하게 세우는 데 더없이 소중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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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13
  • 저작시기2002.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8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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