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속의전쟁 - 매소성 전투(삼국통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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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역사속의전쟁 - 매소성 전투(삼국통일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 문
본 문
결 문

본문내용

군사적 패배는 없었던 것일까. 국내 학계에서는 매소성 전투를 의심하는 중국 측 견해에 반박하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매소성 전투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펼치고 있는 서영교 박사가 주목하는 것은 매소성 전투 직전인 675년 9월에 벌어진 천성 전투다.
\'삼국사기\'는 \"문무왕 13년(675년)9월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용해 풍훈을 길잡이로 삼아 천성으로 쳐들어왔다. 우리의 장군 문순 등이 싸워 이겨 1400명을 목을 베고 전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따라 말 1000필을 얻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서박사는 기록에 나오는 천성이 경기도 파주 교하에 위치한 오두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파주 교하의 옛 지명인 천정구와 천성이 유사하다는 것이 첫 번째 근거다. 지리적인 환경도 기록과 부합된다. 천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전선 40척을 노획했다. 천성이 바다나 배가 다닐 수 있는 큰 강에 인접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파주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바다에서 멀지 않은 하구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가 같은 해 9월에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675년 9월 당나라 설인귀가 인솔하는 전선이 격침되고 같은 달 29일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지리적 장소도 관련이 깊다. 매소성은 일반적으로 경기도 양주 대모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성을 파주 오두산성으로 보고 매소성을 대모산성으로 간주한다면 두 성 모두 임진강 강안에 위치한 성인 셈이다. 서박사는 이 같은 주변 증거들을 기초로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발 더 나아가 서박사는 천성 전투에 참가한 당나라 전선들은 매소성에 주둔한 이근행군을 지원하기 위한 보급선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풀이한다. 서박사의 해석을 뒷받침할 만한 정황 증거는 많다. 당시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기병 비율이 높았던 것도 포인트다. 당군이 전투 후 남긴 말이 3만 마리라면 실제로 보유한 말은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 보병보다 기병은 더 많은 보급 지원을 필요로 한다. 기병용 군마 한 마리가 1개월 동안 먹는 식량은 병사 1인의 식량에 해당한다고 한다. 음력 9월 말은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 다시 말해 더 이상 들판에서 말이 먹을 마초를 구할 수 없는 시기다. 보급이 차단될 경우 입게 될 피해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 당나라 군대는 점령지인 평양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예성강, 임진강 일대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당군은 정복지에 임시로 근거지를 마련한 상태이므로 식량이나 말 사료의 현지 조달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 인조대의 기록을 보면 짐말 한 마리가 운반 가능한 곡식의 양은 약 1.6석이다. 신라 때 수레 한 대가 운반 가능한 곡식은 12석 수준이다. 이에 비해 조선 후기 최대형 판옥선은 2000-3000석, 표준형 판옥선은 1400-1500석, 쌀 운반용 조운선은 1000석의 탑재 능력을 가졌다. 배의 수송 능력은 육로 수송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것이다. 당군이 해상 수송을 선택했을 개연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경우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의 상관관계는 분명해진다. 서박사의 해석은 이렇다. 천성 전투에서 당나라 선단이 격침된 것은 같은 달 29일 신라가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었다. 파주 교하의 천성에서 설인귀의 선단이 상륙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매소성의 당군에 전해졌다. 더 이상 보급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을 때 생긴 불안감은 매소성 전투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무력화시켰다. 신라군이 매소성을 공격했을 때 당군은 이미 심리적으로 저항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전사자는 언급하지 않은 채 말 3만380필과 그에 맞먹는 무기를 버리고 당군이 도망쳤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다. 서박사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가 기념해야 할 대승리는 매소성 전투가 아니라 천성 전투가 된다. 매소성 전투는 천성 전투의 승전으로 자연스럽게 얻어진 부수적 승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 문
삼국통일 부분은 역사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각 나라마다 주장이 다르고 현재 배우고 있는 역사 내용도 많이 바뀌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발해의 존재가 커져 통일 시대라고 하는 것을 다시 남북국 시대로 다시 명칭 했다. 따라서 끊임없는 연구와 분석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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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4.02
  • 저작시기2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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