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발발 원인과 조선의 패배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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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과 조선의 패배 요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외부적 배경과 원인
Ⅲ. 내부적 배경과 원인
Ⅳ. 정묘호란 이후 조선의 방비
Ⅴ. 전개 및 결과
Ⅵ. 조선의 패배 요인
Ⅶ. 결론

본문내용

로 입성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이제 전쟁양상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주력부대가 점차 남한산성 주위를 포위하는 형태로 배치가 되어 남한산성의 조선군과 청군 사이에 공방전이 진행되었으며, 그 외곽에서는 조선 조정의 지시에 의해 각 도의 조선군이 근왕군으로 남한산성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이를 차단하려는 청군과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다. 즉,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2중 포위전 형태의 전투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청 태종이 약 7만 명의 본군을 인솔하여 1월 22일 남한산성에 도달한 후 본격적인 포위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산성의 조선 수비군 1만 4천 명이 견고하게 요새화된 방어진지에서 조직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청군의 공격은 진척이 없었다. 이에 따라 청 태종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여 인조에게 조속히 출성항복을 하도록 요구하면서 각 도의 근왕군에 대한 차단작전을 시행하였다. 이종호, 2014, 앞의 논문, 61-62, 64쪽
3. 전쟁의 종결
각 도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청군에 의해 대부분 격파 당하고 조선 조정 내에서 김류와 최명길 등 주화론자들과 김상헌과 정온등 척화론자 사이의 논란도 1637년 2월 청군의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고 조선 국왕의 비빈과 왕자, 종실, 백관 및 그 가족들이 포로가 되어 삼전도의 청 태종 본진에 억류되자 강화협상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종호, 2014, 앞의 논문, 64쪽
청군도 일단 산성 공략과 같은 적극적인 공세행동은 자제하고 조선국왕의 출성항복을 계속 요구하였다. 강화협상의 쟁점은 항복을 둘러 싼 국서의 형식과 의례절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허태구, 2009,『병자호란의 정치·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15-117쪽. 이종호, 2014, 앞의 논문, 65쪽에서 재인용.
청은 조선을 직접 지배할 수도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대청체제를 수립하고 청 태종이 이제 더 이상 동북 변방에 위치한 ‘소국의 한(汗)’이 아니라 滿·蒙·漢을 아우르는 다민족국가의 황제임을 드러내는 의식행사를 대내외에 천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즉, 제국 통합의 상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1637년 2월 24일 조선국왕 인조를 출성항복하게 하여 삼전도에서 항례(降禮)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종호, 2014, 앞의 논문, 65-66쪽
Ⅵ. 조선의 패배 요인
조선의 패배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가장 주목하는 요인은 ‘강화도 입보 실패’이다. 강화도는 애초에 유사시에 인조를 피난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곳이었다. 과거에도 강화도에서 오랫동안 항전한 적이 있었고 조선은 산성에서의 싸움이 자신들에게 유리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강화도에 입성하는 것이 조선에게 중요했고 청은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잘 방비를 해둔 안주에서 청군의 발목을 묶어 시간을 끌고 강화도로 파천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장기적 국면으로 전쟁을 끌고 가 근왕군을 남한산성으로 집결시킨 뒤 반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의 선봉부대가 보여준 놀라운 기동성과 그로 인한 압박은 조선에게는 공포로 작용하여 강화 행(行) 선택을 망설이게 했을 것이다. 장정수, 2016,「병자호란시 조선 勤王軍의 남한산성 집결 시도와 활동」,『한국사연구』173, 한국사연구회, 182쪽 참조
인조가 남한산성에 입성한 후에는 조선의 전략에는 차질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근왕군의 원래 집결지인 남한산성에서 합세(合勢)를 한 이후 강화도로 반격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병력들이 따로 각자의 도에서 모여드는 바람에 각개격파를 당한 것 또한 패인(敗因)이 되었다. 근왕군이 항상 진 것은 아니지만 잠깐의 승리로 판도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밖에도 패인을 따지자면 남한산성 내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한 비전투 손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이후의 재정적 어려움, 고질적인 병력의 부족 등이 있다. 또 하나에 주목하자면 조선의 정묘호란 이후의 대비가 생각보다 미흡(未洽)했다는 점이다. 인조가 장만, 정충신, 남이흥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비군 편제를 확충했다는 점과 속오군 활성화를 위한 영장제 실시는 높게 살 만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훈련과 군량이 부족했기에 제대로 된 활약을 할 수 없었다. 군대 유지의 중요성은 조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비롯되어 제대로 군 양성과 유지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Ⅶ. 결론
조선의 대비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사전에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점도 지금의 관점에서 바로 보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는 당대의 관점과 시각에서 이해를 해야 하기에 조선의 사상과 당시 풍조(風潮)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역사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필요성이 있다. 비슷한 전쟁이 2번 반복되었다는 점과 또 반복해서 패배하였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방비(防備)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조선은 방비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정묘호란 이후에 자세한 분석에 의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크게 눈에 보이는 부분을 중심으로만 상비군 증편과 방어선 설정을 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도 국가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반복된 사건과 실패를 조우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반복의 빈도수를 줄이기 위해서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여 미래에 대해 대응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조성을, 2017,「병자호란 연구의 제문제」,『韓國史學史學報』36, 한국사학사학회
장정수, 2016,「병자호란시 조선 勤王軍의 남한산성 집결 시도와 활동」,『한국사연구』173, 한국사연구회
이종호, 2014,「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군사』9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허태구, 2018,「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군사력 강화 시도와 그 한계 -인조대 초반 병력 확보와 군량 공급을 중심으로-」,『군사』109,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장정수, 2017,「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對後金(淸) 방어전략의 수립 과정과 그 실상」,『朝鮮時代史學報』81, 조선시대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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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2.01.10
  • 저작시기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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