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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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모양
1) 얹은머리
2) 쪽진머리
3) 땋은머리

2. 조선시대의 장신구
1) 비녀
2) 머리 장식
3) 귀걸이
4) 지환(指環)
5) 노리개
6) 주머니
7) 단추

본문내용

진귀성을 보여주는 패물들을 기품있게 쭉쭉 뻗은 낙지발술 위에 달았다.
노리개는 세 개를 함께 패용한 삼작노리개가 대표적이며, 하나만을 패용하는 단작노리개, 또는 두 개, 다섯개를 함께 패용하는 이작노리개, 오작노리개가 있다. 또한 다는 패물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예복용(禮服用)과 평복용(平服用)으로 구분되며, 패물의 종류,형태, 술의 종류에 따라서 다양하다.(☜)
재료로는 금·은·동 등의 금속류와 백옥·비취옥 ·자마노·홍옥·청강석· 진옥· 금강석·공작석 등의 옥석류, 밀화·산호·진주·금패·대모·호박 등의 보패류, 색사· 주단·금은사 등이 사용된다.형태에는 동자·박쥐·거북·나비·오리 ·붕어·매미·자라 ·해태 등의 동물형태와 가지·고추 ·포도송이 ·목화송이· 천도·연화 ·석류 등의 식물형태,호로병· 주머니·종· 표주박·북·장구 ·자물쇠·안경집· 도끼·방아다리·방울·투호·장도· 석등·벼루 등 생활 주변에서 얻은 형태, 또 불수·염주 등의 형태가 있다.( ☜) 따라서 길상(吉祥)적인 문양을 보편적으로 택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다남(多男), 부귀(富貴), 복(福), 장수(長壽)를 뜻하는 것을 자주 사용하였다.
다남을 상징하는 노리개로는 고추, 가지, 도끼, 박쥐, 투호의 형상을 패물로 장식한 것들이다.
이와 같이 노리개는 하나의 호사스런 장식품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안정된 조화를 이루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여성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다. 노리개는 혼인 때의 예물로 시부모로부터 물려주는 가보였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위엄과 자존을 지키며, 집안을 두호(斗護)하는 믿음으로 노리개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액을 피하는 것으로 어떤 염원을 위해 차기도 했고 향갑. 향낭· 침낭·장도와 같이 실용적인 면에서 찬 것도 있었다. 이 중 향갑. 향낭은 사향등을 담은 주머니로 평소에는 향내음을 은근히 풍기고 급할 때에는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
침낭은 바늘을 꽂아 두던 바늘집으로 부녀자들이 늘 사용하는 바늘을 손쉽게 찾아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반 부녀자가 가장 많이 사용한 노리개 중의 하나였다.
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護身用)으로도 사용하였으며, 또 여기에 은 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有無)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녀가 장조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 4)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70년(현종 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 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 사회에서 상하·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여인들의 은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護身用)으로도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은 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믈의 독의 유무(有無)을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장도끈목의 고리를 꿰이서 차고, 여자의 경우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기도 한다.
6) 주머니
주머니의 역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경덕왕조(景德王條)에 "왕이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때까지 항상 부녀(婦女)의 짓을 하여 비단주머니(錦囊)를 차기를 좋아했다"는 금낭의 기록과 함께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며, 고려시대에도 <고려도경(高麗圖經)> 구;부조(貴婦條)에 "요대(腰帶)에 채조(采條)로 금탁(金鐸)을 달고 금향낭을 찼는데 많은 것을 귀히 여겼다."라는 기록으로 고려인들이 주머니를 찼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주머니의 패용은 여전했으며 우리 의복에는 주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따로 만들어 차던 것이 장식품으로도 사용되었다. 노리개에 다는 주머니로는 수향낭(繡香囊)이 대표적이며, 주머니 둘레가 등근 염낭(두루무머니)과 양옆에 모가 나 있는 귀주머니는 단독으로 찼다. 그리고 염랑이나 귀주머니에는 오색의 술을 달아 모양을 아름답게 꾸몄고, 그 사용한 천과 색·부금(付金)여부에 따라 신분의 존귀·귀천·상하를 나타내기도 했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 나타난 궁낭(궁낭)을 살펴보면 염랑과 귀주머니 두가지로 구분되며, 그 놓은 수(수)의 문양에 따라 황룡자낭(왕을 상징)·봉낭 (왕비 상징)· 십장생줌치 ·오방낭· 연화향낭 등이 있다. 오방낭·오방줌치의 오방은 오행(오행)에서 나온 것으로 동·서· 남·북· 중앙을 나타내는 5방위를 뜻하며 청·백· 홍·흑· 황색의 비단을 보아 만든다. ( ☞)
낭(囊) 발기에서 보면 가례시(嘉禮時)외에도 새해의 첫 번째 돼지날에 대내(大內)에서는 물론 종친들에게까지 주머니를 하사한 것이 보이는데, 액을 면하고 한 해를 잘 지내라는 뜻으로 홍지(紅紙)에 볶은 콩 한 알을 싸서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는 곡식이 잘 여물어 풍년과 평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기원하는 뚱에서 곡식을 태운 재를 넣은 주머니를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었으며 이것은 하나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7) 단추
단추는 원래 원삼 등 예복에만 사용하였던 것이며, 저고리나 여름철 적삼에는 옷고름을 달고 단추는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개화기가 되면서 단추의 간편함을 쫓아 여름철 적삼에 옷고름 대신으로 이용하게 되었고 마고자 등에 고름 대신 사용하였다.
단추에는 예장용(禮裝用)에 사용하던 것으로 금은(금은).옥석(옥석) 단추와 끈으로 맺은 단추가 있었다. 예장용 단추는 나비· 박쥐· 국화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본따기도 하였으며, 가각형에는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 나타난 단추의 이름을 보면 "적의(翟衣)단추, 직금 원삼(直金 圓衫) 단추, 자적 장삼(紫的 長衫) 단추, 다홍 원앙 로의( 多紅 鴛鴦 露衣) 단추, 볼기 단추"라고 있어 그 용도를 알 수 있다.
맺은 단추는 끈으로 매듭을 맺은 것인데 그 모양이 야무지고 보통 입은 옷에 많이 사용되었다. 유물로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대의와 중의에 맺은 단추가 달려 있는 것이 있다.

키워드

조선시대,   복식,   ,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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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2.22
  • 저작시기2002.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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