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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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감리교의 전래

2. 장로교의 전래

3. 의료선교

4. 교육 선교

5. 문서 선교

6. 일제치하에서의 기독교

7. 해서교육총회 사건과 105인 사건

8. 기독교와 독립운동

9. 신사참배 강요 와 교회의 탄압

10. 사회 봉사 활동

11. 북한의 교회 재건

12. 남한의 교회재건

13. 6.25 전쟁후의 교회

본문내용

제 노동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박해하였다. 드디어 1946년 11월 28일에는 그들의 어용 단체로 기독교연맹을
조직하여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하고 김일성을 절대지지하며 선거에 솔선
수범한다는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투옥하거나 추방하였다.
12.남한의 교회재건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완전한 신앙자유를 얻었다. 일제 말엽에 강제로
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해방 후에도 그 합동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
는 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
합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자파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강하여
하나의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장로교,성결교,침례교,
구세군등 각 교파는 각각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13. 6.25 전쟁후의 교회
6.25 사변을 통하여 받은 교회의 손실은 동족 상잔의 비극 그대로였다. 공산당
에 의하여 북한으로 납치되어간 목사의 수와 순교자는 장로교,감리교, 성결교회
만도 236명이었고 교회의 파괴와 손실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교회가
267개에 달하였다.
6.25사변중에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전북 옥구군
원당교회는 75명의 신도중에서 73명은 공산당에 의하여 학살되었다. 이러한 슬픔
과 고통과 어려움을 딛고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터전위에서 날로 부흥되어 갔다.
1951년 2월에는 국군안에 군목제도를 창설하여 현대전에서의 정신적 자세를
확립할 뿐 아니라 젊은 군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선교 전위대
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발전은 교회안에서의 사명을 다할 뿐만 아니라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1954년12월에 각
교파가 힘을 모아 서울에 [기독교 중앙방속국] (HLKY)을 개국하였다.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일제 말엽에 강제로
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해방후에도 그 합동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 합동
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자파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 강하여 하나의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등 각교파는 각각 활발히 선교
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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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19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7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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