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박제가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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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생애와 업적
연표
[새시대 패러다임 제시한 용감한 비주류 ]
[박제가 (朴齊家) 1750∼1815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초정(楚亭)]
[北學議(奎1401), 朴齊家(朝鮮)著.]
[貞유閣集(奎5588), 朴齊家(朝鮮)著.]
[박제가, 『북학의』·박지원, 『허생전』 ]
[박제가의 생애와 사상]

**한글97

본문내용

그는 1801년 9월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3년 동안 경원으로 유배되었고, 1805년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다음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1778년에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새 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 북학의>를 지었다. 그 뒤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명농초고> <정유시고> 등이 있다.
2. 철학사상
박제가는 전문성을 띤 철학 논문운 본격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는 풍수설을 비판하며,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 기풍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풍수가 아니라 사회 환경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놀기만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양반 사대부의 나쁜 기풍은 바르지 못한 환경 때문에 조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박제가의 사회·역사관에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역사를 물질적 재부의 생산과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로 이해한 점이다. 그에 따르면 농업 생산이 저하되는 원인은 과학 기술이 낙후하고 생간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데 있다. 이렇게 되면 세계 발전의 추세에 뒤질게 불을 보듯 뻔하다. 세계의 발전 추세를 따라잡으려면 반드시 상업과 대외무역을 발전시키고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생산 활동에 활용해야 하며, 이용후생에 유리한 모든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는 이용후생을 정치의 기본이며 도덕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생산과 소비의 관계 문제에서 그는 물질적 재부의 생산을 늘려야만 소비품을 증가시켜 농민의 생활 수준을 높일 수 있으며, 소비품 생산을 늘려야만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전 실학지들이 토지제도의 개혁에 중점을 둔 것과는 달리. 중농억상(重農抑商) 사상을 벗어나, 당시 사회 발전의 추세와 상인·중인 등 성장하느 시민 계층의 이익과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는 절용(節用)·절검(節儉)보다 사치가 국부를 증진시킨다는 용사론(用奢論)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백성을 이롭고 넉넉하게 하느가 하느 데 있었다.
박제가는 인류의 역사를 물질적 재화 생산의 발전사와소비폼 생산의 발전사와소비품 생산의 발전사 그리고 문화의 발전사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사뢰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이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느 자에게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국왕과 고관대작을 계몽시켜 봉건적인 법을 개선하자는 데 머물렀다.
3. 실학사상
박제가의 실학 사상, 특히 북학 사상은 앞선 실학가들의 사상과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다. 박제가는 이전 실학자들이 '농본 사상'에 바탕을 두고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는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과 달리, 농업을 중시하면서도 상업과 수공업의 발저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제가가 이해한 실학의 구체적 내용은 상업·무역·화폐·유통·농업 기술·수공업·교통 운수·국방 등이었다. 그는 '이용후생'할 수 있는 모든 학문을 실학이라고 간주하는 한편, 주자학자들이 일삼는 공리공담은 학분 자체에도 쓸모 없고 '이용후생'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박제가는 나라의 부강을 위하여는 외국의 선진적인 문물 제도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박제가가 제기한 북학은 나라의 낙후성을 극복 하고 발전을 꾀하려는 사상이었다.
박제가는 사회적 생산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양반과 문벌 및 과거 제도의 폐단인 문벌의 의한 관직의 세습에 반대하고, 실제의 쓰임에 맞게 인재를 등용하며, 비천한 집안의 재능 있는 자제를 추천하는 제도 등을 실시하자고 하였다. 그가 반대한 것은 과거 제도 자체가 아니라 과거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관직의 세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분 등급제도를 반대하고 인권의 존중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노비의 해방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박제가는 상업의 진흥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낙후한 경제 상황을 극복하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내적으로는 상업을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무역을 발전시켜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의 낙후와 농민 생활의 빈곤을 야기한 경제적인 원인은 생산력이 발달하지 못하고 재화가 유통되지 않음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상업은 자원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게 함으로써 생활을 향상시키는 등의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아가 자급 자족적 자연 경제 아래에서 상업은 상품 유통을 촉진하여 사회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촉진시키기고 한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상인을 경신하는 풍조를 반대하여다.
박제가는 상업과 대외 무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통 운수업이 발전해야 한다고 보고,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징에 근거하여 수상 운수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박제가는 과학 기술이 국가의 부강과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논하였다. 그는 『북학의』에서 당시의 중국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노동 도구와 무기를 개선하고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경작법을 개량하는 등 과학 기술을 개조하자는 건의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에 따르면 백여 년간이나 평화가 지속되고, 백성의 사치한 풍속이 없는데도 나라가 빈곤한 까닭은 과학 기술의 낙후라고 보았다. 이런 이유는 중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군대의 폐단을 드러내고 군대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그는 군사력이 국가 경제의 발전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의 물질적 기초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징병제를 용병제로 대체하고 군대의 수를 감축할 것과, 사병에게 녹봉제를 실시하고 무기와 훈련 및 방어 시설을 강화하여 국가의 방위 능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았을 때 박제가는 이전의 실학자들과는 중상론(重商論)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사민 평등론이나 선진적 과학 기술 수용론 등을 통하여 당시의 시민 계층의 이익과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박제가의 사상의 봉건 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한 거 같다.
§ 참고문헌
실학파의 철학사상 주칠성 예문서원
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 신용하 지식산업사
실학의 철학 한국사상사연구회 예문서원
한국 철학사상사 김문용, 이흥용 예문서원
이야기 한국철학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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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26
  • 저작시기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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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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