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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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하여

Ⅱ. 전근대 한국사 인식의 변천

Ⅲ. 근 . 현대 한국사 인식의 변천

본문내용

국 근대 역사학은 1930년을 전후해서 민족주의 역사학과 사회경제사학, 그리고 문헌고증사학으로 분화, 발전
① 민족주의 역사학
- 성격 :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역사학을 연구, 민족정신의 회복과 고취를 연구의 목표로 삼아 정신사학으로 발전시킴
- 제약점 : 관념적 정신사학에 머물러 민족해방운동의 실체로서 민중을 부각하지 못하고 있음
② 신민족주의 사학
- 성격 : 역사에서의 계급운동을 어느 정도 수용하기 시작함, 해방 후 민족화해와 계급화해를 통한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을 지향
③ 사회경제사학(마르크스주의 역사학) : 1920년대 후반 민족해방운동의 고양과 사상계의 새로운 조류인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반식민주의 역사학으로 성립
- 성격 :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의한 한국사 인식, 특히 한국사의 합법칙적 역사발전을 과학적으로 해명(정체성론의 극복), 마르크스의 社會發展五段階論(원시공동체사회 노예제사회 봉건제사회 자본제사회 사회제 · 공산제 사회)을 한국사에 적용
- 제약점 :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한국사에 敎條主義的(교조주의적)으로 代入, 프롤레타리아의 階級性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再偏向的 誤謬를 범함. 따라서 1930년대 이후 대두한 反動的 파시즘체제에 대처하기 위한 광범한 民族統一戰線의 형성을 이끌어 내지 못함
④ 文獻考證史學
- 성격 : 역사연구에 있어서 사관과 이론을 배격, 史料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고증을 위주로 한 실증주의사학,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일본의 東京帝大
와 와세다대학, 국내의 京城帝大에서 전문적 역사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중심이 됨
- 제약 : 과학적, 합리성의 면에서는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부족함이 없으나 당시의 민족적, 사회적 과제를 放棄(방기)한 역사인식 부재의 역사학. 또는 일제 관학자들과 같은 역사관과 연구 방법론, 한국사인식체계를 가진 식민주의 역사학이 아류로 평가되기도 함.
3. 解放 空間의 歷史認識
1) 解放空間의 民族的 · 社會的 課題
- 自主的 統一 民族國家의 樹立
- 植民잔재와 反民族者(親日派)의 청산을 통한 革命的 民族改革의 추진
- 따라서 解放空間의 課題는 反外勢 自主化와 社會的 民主化로 집약될 수 있다
2) 解放空間의 정세
- 美 · 蘇의 南北韓 分割占領(분할점령)으로 인한 民族的 自律性이 크게 제약된 채, 南韓에서는 美軍政의 反共 우선정책으로 親日官僚(친일관료) · 親美地主 등 반민족 세력이 親美세력화하여 그 政治的 · 階級的 特權이 오히려 강화되어 감
- 특히 이승만과 한민당 등 친미세력은 군정수립을 획책하여 國土分斷을 민족분단으로 몰고 감
- 따라서 解放空間의 民衆들은 미군정의 반공정책과 親日派 등용 등에 반대하여 친일파 청산과 민주적 社會改革을 요구하고, 親美勢力의 군정수립의 의도를 봉쇄하는 투쟁을 전개하여 감.
3) 歷史學의 東向
(1)마르크스主義 歷史學(社會經濟史學)
①활동
-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植民史觀의 克服과 民族解放을 목적한 한국사 연구를 진행해 온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해방후 民衆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면서 親國家 建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감
- 따라서 이들은 1945.08.16일 백남운을 중심으로 '朝鮮學術院', 10월 '朝鮮科學者東盟', 1946년 5월 '民族文化硏究所' 등을 창립하여 실천적 변혁논리를 세우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조선시대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사회구조를 해명하는 학술적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신국가 건설 등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감.
- 특히 이 시기 백남운은 左 · 右派 民族勢力의 연합과 民族統一戰線(민족통일전선)을 지향한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을 주창하고, 이에 기초한 '신민당'의 창당과 民戰(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참여를 통한 신국가 건설운동을 전개
- 그러나 美軍政의 反共政策의 강화에 따른 정세 변동과 학문적 소신에 의해 이들은 1947. 가을쯤 거의 越北(월북)하여 북한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 학문적 의지를 실현
② 한계
- 이 시기 백남운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여전히 '아시아的 生産樣式論(생산양식론)'에 얽매여 停滯的(정체적)인 한국사 인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함
(2) 新民族主義 歷史學
① 성격과 활동
- 1930년대 후반 안재홍에 의해 제창되기 시작했던 신민족주의 역사학은 연합군에 의한 민족해방의 달성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해방후 좌우파의 대립 속에서 이의 극복을 통한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여 안재홍 · 손진태 · 이인영 등에 의해 심화
- 신민족주의 역사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안재홍은 내적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원 간의 대립을 해소, 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해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는 만민공생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주창
- 손진태 역시 당시 民族의 課題는 階級鬪爭과 정권투쟁이 일소된 통합된 민족국가의 건설,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친선을 강구하는 것으로 인식
- 이와 같이 신민족주의 역사학은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과 민족적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라는 실천적 관점에서 민족사 체계화에 노력
② 한계
- 신민족주의 역사학은 필연적으로 민족화해와 계급화해적 입장을 포함. 그러나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신민족주의 역사학은 해방공간의 역사적 현실과 그것이 요구하는 사회적 과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이상론에 그친 것으로 평가
- 전민족의 성장이라는 체계 속에 사회발전의 합법칙적 논리의 배제, 계급갈등과 투쟁이 민족사의 발전과정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무원칙한 계급화론을 강조하여 이 시기 民衆의 사회적 요구를 현실적으로 방기함
- 따라서 해방공간의 민족적 과제인 새로운 국가건설을 주도하는 역사학으로 한계를 지님
(3) 文獻考證史學
- 일제하의 문헌고증사학자들은 해방공간에서 친일잔재의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는 정세에 편승하여 활동을 재개하여 1942년 자진 해산 하였던 震檀學會를 재건
- 이병도, 김상기, 이상백 등은 경성대학에서 자리를 잡고 후진양성을 통해 자신들의 학풍을 보급
- 그러나 이들의 역사학은 해방 후에도 일제하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통하여 일제 식민사학의인식과 방법론을 계승
- 해방공간의 민족적 과제에 대한 실천적 전망을 못 갖고 미군정하의 보호를 받으며 역사학계에 뿌리를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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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7.15
  • 저작시기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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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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