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도산서원에 대한 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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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퇴계와 도산서원에 대한 일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서 론
- 서원이란?

● 본 론
1. 퇴계이황(退溪李滉)
2. 퇴계의 도산서원(陶山書院)
3. 서원(書院)의 역활
4. 퇴계의 교육

● 결 론

본문내용


(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겸손하게 행동함으로서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
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충신의 마음가짐과 겸손한 행실로서 예의를 실천하고 경세의 기운을 잃지 않는
선비를 길러야겠다고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길
이라 믿었다. 이것이 곧 퇴계의 교육관이다. 그리고 퇴계가 지향하는 교육자의 상이란 바로
이와 같은 '선비의 육성자'가 되는 것이었다.
선생은 단순 지식만 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차원에서 인격형성에 감화를
줄 수 있는 이른 바 '진정한 스승'이 되어야 한다. 선생이 이러한 '스승의 상'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제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제자에 대하는 것을 마치
벗처럼 하였다. 비록 어린 제자라 하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며 보내고 맞이할
때는 항상 공손히 경(敬)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늘 드나들며 배우는 제자일망정 반드시 자
리에서 일어나 절을 받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의례 부형의 안부부터 물었다고 한다.
평일의 경우에도 제자가 먼길을 떠나면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여 보냈다는 것이다.
수업에 있어서는 각 제자의 학문 정도에 따라 각기 알맞게 가르쳤고 반복하여 자세히 설
명하면서도 그러한 가르침에 조금의 염증도 느끼지 않았다. 비록 병으로 아파도 강론(講論)
을 쉬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는 이미 중환이었는데도 강론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 제자들이 뒤늦게 깨달을 정도였다.
선생의 강론은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다한 것을
직감한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4일전에 자제들이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죽는 마당에 제자
들을 아니 볼 수 없다."하며 제자들을 불러놓고 "평소에 올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종일
토록 강론한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마지막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이 제자에 대한 정중한 예의와 성실한 강론은 높은 인격과 제자에 대한 깊고 뜨
거운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선생이야말로 무한한 애정을 쏟을 줄 아는 동시에 강한 인격의 감화를 줄 수 있는 '성실
한 스승의 상'을 남겨 주고 있는 것이다.
퇴계의 문인은 참으로 많아 유명한 사람만도 360여명이나 되니, 우리나라 교육사상(敎育
史上)에서 최고요, 실로 경이적인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비롯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월천
(月川) 조목(趙穆), 한강(寒岡) 정구(鄭逑),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문봉(文峯) 정유
일(鄭惟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사암(思菴) 박순(朴淳) 등 당대를 주름잡던 기라
성 같은 제자가 쏟아져 나온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 결 론
지금까지 조선시대 서원에 중의 퇴계이황의 도산서원의 교육적인 면과 그 기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재지방적(在地方的) 성격의 사림들의 생활영위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학적(私學的)인 학교기능을 가진 서원의 성립을 보았으며 국가의 사액서원 지정으로 급격히 발전하는 양상을 띤다. 서원은 교육과 사회적 기능이 결합한 복합적 기관으로서 향촌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심체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비록 후기에 들어와서 당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학문의 문화적 교류와 각지방의 잠재된 문화의식을 서원을 통해 개발되어 다양한 학문적 풍토를 기대할 수 있었다. 특히 서원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퇴계 이황은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퇴계와 함께한 유학(성리학)의 발전에는 서원의 발달과 그 자유스러운 그리고 엄숙한 학문적 풍토에 연유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문화재로써의 서원이 아닌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서원을 바라보고 고찰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 강주철, 「書院과 그 社會的 機能」『한국사론』8, 국사편찬위원회, 1982.
◎ 이범직, 「朝鮮初期 書院의 敎育機能」『한국사론』8, 국사편찬위원회, 1982.
◎ 송양섭, 「조선시대의 서원교육」『강원문화연구』13, 1994.
◎ http://my.dreamwiz.com/ohjs7/
◎ http://members.tripod.co.kr/hyo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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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3.12.16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8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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