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정치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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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교와 정치원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유교와 성리학의 수용과 정치이념의 발전
2. 유교의 사상적 특성과 발전방향
3. 조선전기 성리학의 주체적 수용(15세기)
4. 조선 중기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16-17세기)
1) 16세기 성리학 이해의 심화
2) 17세기 예학의 발달과 사회경제정책의 대립
5. 조선후기 성리학의 경향
1) 18세기 새로운 사상경향(실학)의 대두
2) 19세기 성리학의 경직화와 극복 노력의 좌절

Ⅲ. 결론

본문내용

. 또한 한 세대 아래로서 청의 문물과 고증학의 수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계열도 있었다. 이처럼 세도정치의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사상계는 청의 문물을 수용하는 데서 나아가 청의 학문인 고증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면서 경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조선사상계의 고증학 수용은 일단 성리학의 자체적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따라서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주자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동요시켰으며 금석학ㆍ음운학 등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또한 고증학의 폭넓은 학문범위와 박학적 경향은 방대한 백과사전식 저술이 나오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상경향을 주로 중앙의 세도가문과 경화사족 출신의 관료학자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당시 현실모순을 해결하는 데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였다. 한편 서울 지역 학자들 가운데 성리학적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극복해보려는 노력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과 최한기였다. 근기남인이면서 근기남인실학과 북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정약용은 지주소작제와 양반신분제의 철폐, 인민주권 주장 등 중세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지향했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최한기는 북학과 고증학뿐만 아니라 서양의 자연과학까지 수용하였다. 그는 과학적 진리의 인식론적 근거로서 기 개념(기학)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기학은 가치론 중심이며 직관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성리학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사유방식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진적인 사상이 세도정권에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였다.
18,9세기에는 이전까지 학파를 기준으로 형성되었던 조선사상계가 서울과 지방이라는 지역을 기준으로 새로 재편되면서 지방학계는 서울학계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 데 반하여 호락논쟁에서 제기되었던 이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방의 재지학자들이 주로 관심을 쏟았던 것은 호락논쟁에 잇닿아 있던 심성론이었으며 이는 명덕주리주기논쟁(明德主理主氣論爭)으로 전개되었다. 논쟁과정에서 낙론계 산림은 명덕주기론을 주장하는 계열과 명덕주리론을 주장하는 계열로 분화되었다. 명덕주기론 계통은 세도정권과 타협하는 계열과 성리학적 실천기능을 강조하는 계열로 나뉘어졌던 반면 명덕주리론 계통은 이를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위정척사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사회변동이 급격히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모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일반 민들의 의식도 점차 성장해 나갔다. 이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데는 지식을 습득하기 쉬워지고 생활의 폭이 넓어진 것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장시의 발달로 정보유통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두레나 초군(樵軍)같은 노동조직을 통하여 공동체의식이 성장하였다. 천주교의 전파와 미륵신앙으로 표출되었던 이상사회론은 일반 민들로 하여금 변혁을 꿈꾸게 하였고 나아가 이러한 일반 민의 의식성장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동학은 한말 변혁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세도정치기는 사상적으로 암흑의 시기는 아니었다.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였지만 세도정치라는 현실에 억눌려 좌절되었다. 세도정치하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개혁적인 요소를 가진 사상은 가혹하게 탄압하거나 체제유지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 민들의 전면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Ⅲ. 結 論
불교가 수용되어 찬란한 개화를 시작하자 유학은 종교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란 내세관을 포함하는 협의의 종교적 역할을 뜻한다. 이후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시대로 내려오면서 불교는 주로 종교적 영역을 담당했고 인간의 기본 윤리나 일상의 도덕, 나아가서 국가의 통치철학은 유학이 전적으로 맡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숭유억불책을 정책의 기조로 삼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사실은 유학을 가지고 나라를 세운다는 열띤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영역은 여전히 불교가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조는 실은 유불이 공존했으며 도교도 정신생활에 상당히 깊이 침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여튼 유학은 국교의 지위를 누리면서 정치이념으로서 사상계 전반을 지배했다.
─참고문헌─
고영진, 1997 「성리학의 이해와 왕도·민본」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상사의 과학적 이해를 위하여』청년사)
김인호, 1995 「유교정치이념의 발전과 성리학」『한국역사입문』(2) 풀빛
성균관대학교, 1997 「유학사상」
최영성, 「한국유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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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3.12.23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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