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제 1공화국
<제 1공화국의 통치조직>
<제 1공화국의 기본정책>
<제 1공화국의 정당>
<제 1공화국의 정치상과 사회상>
<제 1공화국의 붕괴>

2. 제 2공화국
<제 2공화국의 주요시책>
<제 2공화국의 사회상>
<5.16군사 쿠테타>
1)5․16 쿠데타 주체세력
2)한국현대사의 분수령
3)쿠데타의 명분
4)군부의 소명의식
5)정치개입의 구조적 요인들
6)쿠데타의 성공 이유
7)쿠데타 주역들의 통치의식

본문내용

국가를 구원할 유일한 세력이라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확연히 드러냈다.
4)군부의 소명의식
해방 후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군의 지배가 오래 지속된 데는 당시까지 진행됐던 군부의 양적·질적 성장이 원인이 됐다. 한국의 군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 급속히 성장하여, 50년 10만 규모에서 56년 70만 대군으로 변했다. 이러한 군부의 양적 팽창은 민간집단이 미성숙한 현실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역할 팽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양적 팽창보다도 정치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은 군부의 급속한 제도적, 기술적, 조직 적 발전이었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 원조와 훈련 지도로 성장한 군부는 사실 50년대의 전기간을 통하여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하고 서구화한 집단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부와 민간 집단들 사이에 존재한 이러한 괴리는 자연히 군 장교들에게 민간 엘리트에 대한 불 신감을 조장했고, 진정한 국가 발전을 담당할 세력은 자신밖에 없다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부추겼다.
5)정치개입의 구조적 요인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 외에 쿠데타 주역들의 군 내부적 불만도 모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나는 상급 장교들의 부패와 이승만(李承晩)에 의한 이들의 정치적 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급 기회의 소멸에 대한 불만이었다. 군부의 뿌리깊은 파벌주의와 연결됐던 이러한 군내부의 갈등은 장면(張勉) 내각 수립 이후 하급 장교 주도의 정화운동으로 본격화했고, 급기야 소수의 모반집단에 의한 직접적인 정치행동으로 터져 나왔다. 사회적 수준에서 볼 때, 건국 이후의 정치·사회적 파행이 청년 모반집단에 또 다른 행동 동기를 부여했다.
이 정권의 수립과 함께 도입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는 들어오자마자 곧 타락해 버렸고, 학생 봉기 이후 있었던 장면 정부의 민주주의 이식노력도 국가능력이 민간사회의 욕구를 따라가 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이 자유민주주의의 이상 그 자체를 부인하면서 보다 강력한 국가와 효율적인 행정을 앞세운 군 장교들의 정치 개입 및 장기적인 군부통치에 구조적 여건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5·16 쿠데타는, 건국 당시 도입됐던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의 실험이 여의치 않자, 이를 거부하고 강력한 군부·관료적 국가와 효율적인 경제개발을 전면에 내세운 권위주의 세력이 당시까지의 복잡했던 힘 투쟁을 일단락지은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6)쿠데타의 성공 이유
체념상태에 있던 일반 국민이나 무기력했던 장면 정부, 군부 내 반대세력, 그리고 당시 한국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던 미국정부 어디서도 쿠데타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나 저항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건국후 민간세력이 주도한 13년 동안의 국가건설 노력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상태에서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4·19 봉기와 5·16 쿠데타는 역사적인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일한 사회경제적 조건 하에서, 또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정치구조적 조건 하에서 나타난 두 개 의 서로 다른 정치적 대응을 의미했다. 그 두 대응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힘을 대변한 두 세력, 즉 학생과 군인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학생의 대안은 무력과 조직력을 결여하여 실현될 수 없었던 반면, 군인의 대안은 이 둘을 보 유하여 실현될 수 있었다. 동시에 학생의 행동이 즉흥적이고 비체계적이었으며 자연 발생적이었던 반면, 군인의 행동은 비교적 계획적이고 체계적이었다.
7)쿠데타 주역들의 통치의식
그러나 군부의 대안이 처음부터 뚜렷한 이념과 정책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의 통치의식이 처음부터 일관됐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군부가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한 집단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군 장교들은 투철한 반공의식을 빼면 어떠한 뚜렷한 이념 경향이나 국가 건설의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쿠데타 성공 후의 정책방향, 특히 민정 이양의 시기와 방법에 관한 쿠데타 주역간 의 혼란과 알력을 야기했다.
실제로 쿠데타를 주도한 젊은 장교들은 비교적 명확한 통치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나 상급 장교들은 군이 일정한 역할을 한 뒤 물러나기를 원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군 내부의 치열한 파벌 투쟁의 한 원인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이후의 정치구조 는 결국 유사 민간화한 형태의 군사정권으로 귀착됐다. 이러한 유사 민간화한 권력구조 속에서 박정희(朴正熙) 개인의 권력집중은 정차 강화했고, 그 절정에서 유신체제가 선포되었던 것이다.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4.02.14
  • 저작시기2004.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316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