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커뮤니케이션 효과이론 - 탄환효과 이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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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 본론
1. 매스커뮤니케이션 효과이론
① 탄환효과이론
㉠ 탄환이론의 생성 및 그 시대적 배경
㉡ 탄환이론의 기본가정
㉢ 탄환이론의 수용자
㉣ 탄환이론에 관한 대표적 실증연구
㉤ 탄환이론에 대한 비판
㉥ 탄환이론의 쇠퇴 - 새로운 모형의 등장
② 소효과 이론
③ 중효과 이론
2. 다시 강효과로 돌아오는 커뮤니케이션 효과

Ⅲ . 결론

본문내용

한 10월 30일이 29일과 31일 사이였던가.
관제데모가 곳곳에서 벌어지던 11월에는 당시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였던 '민통련'에 대한 해산명령이 떨어졌고,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주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종철군도 잡혀 들어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고문치사를 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건은 그동안 숱하게 있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선전. 탄압과 같은 맥락의 사건이며, 민주화운동과 '애학투', ' 물침략'과 '물고문'은 무관하지 않으며, 다음해 급박하게 치달은 '4.13호헌 조치'와 6월 항쟁도 내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댐 평화의 댐 사건을 1986년 10월이나 11월의 시점에서 정부가 발표한 내용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연관되는 다른 사건이나 전체의 시대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 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는 시간의 긴 흐름 선상에서 어느 때인 가, 전후 사정은 어떠한가, 다른 사건이나 인물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사회의 모 순 그리고 사회의 모순구조에서 형성되는 대립되는 양대세력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가, 역사적 과제 해결 방향에 합치하는가 역류하는가 등을 종합적.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야 한다.
사례 2
1987년 13대 대선에서의 지역감정 유발
밀레니엄 시대에 어떻게 보면 케케묵었다 할 수 있는 지역감정을 사례로 든 이유는 탄환이론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그런 언론조작에 다시는 당하는 말자는 다짐과 아직도 현실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망국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이유에서이다. 지역감정이 여전히 치유해야 할 망국병으로 남아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국민의 일상적 정실주의, 수국기득권 세력의 분할지배주의, 개혁세력의 보신주의 등)가 있겠지만 언론의 상업주의가 가장 큰다고 본다.
1987년 대선은 언론의 조작으로 인해 한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 선출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가장 큰 요인은 김대중, 김영삼의 후보단일화 실패이지만 지역감정의 유발을 통한 언론의 조작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큰 요인이었다. 가장 좋은 자료는 MBC뉴스에서 방영(MBC 뉴스데스크 10월 30일자 기획보도)한 '되돌아본 대선'에 잘 나와있으나 지면상의 제약으로 그 당시의 신문을 분석한 내용을 올리도록 한다.
1987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는 2면과 3면에 각각 『삼국시대의 재판인가』『이것이 민주주의인가』라는 사설과 칼럼을 내보냈다. 특히 사설은 "잘라 말해서 시정의 '삼국시대'론의 탄식은 양 김씨에게로 그 책임이 돌아감이 감출 수 없는 사실이고 (……) 오늘의 영·호남 '적대감정'의 불씨를 뿌리고, 각각 자신의 집권을 무슨 신화나 받은 절대성처럼 공언하면서, 구체적인 선거행동에 돌입하여 기름을 끼얹고 부채질을 했다"고 쓰고 있다. 유세장 폭력의 원인을 지역감정으로 보고 그 책임을 야권 후보의 분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노태우 후보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위의 시각은 같은 날 사회면 '각계 소리'에서도 드러났다. 이 기사는 "현재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부각된 지역감정 문제는 단일화를 못한 양 김씨에게 직접 원인이 있다"라고 말한 뒤 이어 "또 야당후보들은 이 같은 지역감정이 자신들의 후보단일화 실패에 기인했음을 인정,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듯한 행동이나 말을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호남지역에서 발생하는 폭력사태는 여지없이 1면 머릿기사로 다루어졌다.
김영삼 광주유세에서의 난동사건이라든가 김대중 부산유세에서의 난동사건은 언론의 지역감정 유발을 통한 왜곡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지역 대중들의 지지열기를 반군부독재 전선으로 수렴되게 하기보다는 왜곡된 방향의 지역적 대립의지로 전환시키는 데 이 두 사건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 통하여 노태우는 군부독재에 대한 반감을 지역감정으로, 김영삼이나 김대중을 지역감정에 기초하는 지역적 지도자로 격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987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 첨부 "유세장 폭력…선거분위기 불안" "노후보 전주유세 무산"-돌 화염병 난무…격렬방해-)
사례 3
새마을 운동
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으로, 1970년 4월 22일 한해 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 장관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수재민 복구 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 재건 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였고, 이것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초기에 단순한 농가의 소득 배가 운동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부터 도시, 직장, 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 자조, 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정부는 이 운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 주었으므로, 새마을 운동은 곧 정부 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마을 운동은 초기의 농촌 개발 사업에서 출발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엄청난 물량적, 정신적 성과를 얻어 가면서 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새마울 운동의 정치적 의미가 중요시되었다. 이는 정부가 정치적으로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 상황에서 농민과 서민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유신 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돌파구로서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1970년대 어디를 가든지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좋아졌네! 좋아졌어] [새벽종이 울렸네]의 노래가 들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가뭄대책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처음 구상을 밝힌 새마을 운동이 전국을 휩쓸며 정치. 경제.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부흥운동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에 힘입어 고질적인 가난의 병폐에서 벗어나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반면, 정치적인 억압의 눈가리개용이라는 비난과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를 확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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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2.28
  • 저작시기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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