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여성들의 농촌계몽운동과 절제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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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하였다. 만일 대만과 관동주에서 아편을 재배하게 되면 밀매매가 성행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아편의 가격이 폭등하자 아편 소비가 거의 없던 한국을 재배지로 주목하게 되었다.128)
그리하여 일제 당국은 1919년 조선아편단속령 동시행규칙을 발포하여 앵속재배의 허가, 총독부 아편매상제도를 시행하여 이를 大正제약주식회사에 불하하여 마약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했다.129) 그런데 1차세계대전이 예상외로 일찍 종전되자 마약 가격은 다시 하향하여 조선에서 생산되던 아편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그러자 대규모 설비를 갖추고 마약을 생산하던 大正제약주식회사는 타격을 받아 매년 손실이 누적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밀매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大正제약주식회사의 아편 밀매는 조선내에 아편중독자를 심각할 정도로 증가시켰으며, 그리고 일본 내지에서 생산된 마약도 역시 약종상이 수입하여 조선에 공급함으로써 아편 중독자를 증가시켰다. 아편중독자가 증가하게 된 것은 또 하나 일제 총독부의 마약관련처벌법이 관대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마약에 관한 조선에서의 관대한 처벌과 大正제약주식회사의 해외 판매부진 등은 조선내 마약중독자의 수를 크게 증가시켰다. 당시 경기도 이남지역만 하더라도 그 수가 1만명이 넘는다고 하였다.130)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일제 당국은 다시 조선을 아편공급지로 주목하였다. 만주국에 판매하는 아편에 대해서는 그 지역 자체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부족분에 대해서는 「準외부공급방식」이 채택되었다. 그 주목지역이 한국이었다. 한국이 주목을 받은 것은 감시 통제를 철저히 할 수 있고 다른 지역보다 아편 흡연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만일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라면 아편 밀매를 단속하기 위해서 엄청난 인력과 경비가 요구된다. 따라서 일제는 만주사변직후 한국을 아편 공급지로 삼았다.131) 당시 한국인들은 아편에 대해 잘못 인식하여 사용하는 부류가 있었다. 다음의 기록은 그러한 실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전북 전주는 아편이 엇지 만히 류행하는지 부인들이 일할때에는 그 어린 아희의게 아편 주샤를 하야 잠을 들게하고 일을하나 그러나 그들은 강연을 듯고 이런한일을 금지하기로 작뎡하엿다.132)
이외에 성적 기능을 강화시켜준다는 회춘약으로 잘못 알고 사용하거나, 혹은 중독의 공포를 알면서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현실을 잊기 위한 현실도피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133) 만일 돈이 없으면 도적질을 해서라도 아편 주사를 맞는 실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상적인 생활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아편 중독자들이 나날이 확대된다면 조선 독립은 기대할 수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여성들은 식민지 상황의 어려운 현실속에서 정신과 육체를 파괴시키는 아편 추방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지를 돌며 아편의 폐해에 대해 계몽 강연을 했다.
기독교 여성들은 일제당국의 아편 매매를 통한 재원 확보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134) 아편 추방운동을 통해 아편을 근절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편 추방운동은 곧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이며 민족 독립을 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8년 중반을 기점으로 근우회에서 탈퇴한 기독교 여성들은 농촌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이 운동에 착수한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한국교회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의식 전환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곧 기존의 사회봉사적 차원에 머물던 사회의식에서 민중생활 향상 차원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을 가리킨다. 당시 한국 교회가 ① 새로운 사조 유입에 의한 영향 ② 한국 경제의 파탄 등으로 현상유지에 불과한 침체를 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8년 예루살렘 선교협의회 개최는 한국 교회가 사회문제로 의식을 전환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의 민중화와 실제화에 대한 인식 전환은 당시 사회문제의 최대 현안이었던 농촌문제 해결에 집중하게 했으며, 기독교 여성들은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농촌계몽운동에 착수하게 되었다. 둘째는 기독교 여성들의 농촌여성문제에 대한 재인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이 농촌계몽운동에 착수하기 이전에는 도시중심의 여성지위향상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28년 중반을 기점으로 도시중심에서 농촌으로 운동을 확대한 것은 농촌여성문제의 해결이 곧 전 조선 여성의 문제해결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사회주의 진영 여성들과의 운동노선 갈등으로 인한 독자적인 운동 노선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기독교 여성들은 문맹퇴치운동과 민족의식 소생운동, 농촌여성지도자 양성운동, 다른 기독교 단체와의 연대를 통한 운동, 농촌여성들의 생활개선운동 등의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여성들의 농촌계몽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쇠퇴하게 되고 그 대신 절제운동의 활성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1932년을 기점으로 기독교 여성들은 농촌계몽운동에서 절제운동의 확산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데, 이러한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일제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으로 인한 기독교 여성들의 농촌운동 쇠퇴를 들 수 있다. 즉 농촌운동 쇠퇴로 인해 새로운 운동을 모색한 결과 나타난 것이 절제운동의 활성화였다. 둘째, 1928년 중반 이후 다시 전개된 사회주의자들의 제2차 반기독교 운동과 1930년대 초반 신비주의적 소종파운동의 발흥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1932년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가 "사회신조"를 채택함으로써 기독교 여성들의 절제운동이 활성화하였다. 셋째는 1930년대 초 도시화의 발달을 들 수 있다. 도시화의 발달은 퇴폐문화의 확대를 야기하였으며, 이것은 기독교 여성들이 주도하던 절제운동을 활성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시작된 절제운동의 활성화 방향은 금주금연운동, 공사창폐지운동, 합리적인 소비절약운동, 아편 추방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들은 모두 민족운동과 여성운동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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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05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8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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