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체제와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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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비인체제의 원칙
1. 정통주의원칙
2. 세력균형원칙


Ⅲ. 각 국의 입장
1. 러시아
2. 영국
3. 오스트리아
4. 프로이센
5. 프랑스


Ⅳ. 비인체제의 전개
1. 비인회의
2. 신성동맹
3. 4국동맹
4. 5국동맹


Ⅴ. 비인체제의 영향


Ⅵ. 결론

본문내용

, 또 선진 자본주의 국으로서 국가 이익을 추구한 영국의 외교정책에 힘입어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비인체제로부터의 간섭을 면할 수 있었다. 1830년에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 비인체제는 더욱 크게 분열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동맹을 맺어 자유주의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고 동유럽 3국은 3국 비밀협상을 맺어 신성동맹의 부흥을 노렸다. 그러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것이 1848년의 혁명으로 분출되자 빈 체제는 붕괴되었다. 비인체제는 왕정복고, 반혁명, 반자유 등의 넓은 범위에서 열강간의 공동협력을 통한 유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하였지만, 프랑스 문제 등 자국익 차원의 문제에 있어서까지 모두 일치하는 확고한 체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파기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또한 사상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 혁명의 자유, 민주주의 사상 등은 이미 온 유럽에 전파되었고, 비인체제는 이를 억누르려 하였지만, 이는 불가능하였다. 소수, 약소민족의 독립 요구는 필연적인 것으로 1920년대 이후 각 지역 민족의 독립운동은 빈 체제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인체제 이후 유럽 각 국들의 외교에 미친 영향들을 살펴보면 우선 1815년 이후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륙으로 인식되었다. 유럽의 5대 열강은 세계 모든 문제에 개입하였고, 이는 1897년 미-서 전쟁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강대국은 스스로가 약소국보다 월등하다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강대국은 보다 광범위한 국제정치의 책임성과 경제력, 군사력 확보를 하였고, 약소국은 열강간의 경쟁, 대립에서 벌어지는 외교전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열강들은 간섭의 원칙을 일반적인 세력균형의 원칙으로 수용하게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최초로 직업외교관제도가 생겼다. 군주들간의 철저한 비밀외교가 지속되었으며, 이는 1919년 베르사이유회의에서 미국의 윌슨의 14개조항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Ⅵ. 결론
유럽지역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은 과거에 대한 역사의 이해가 필요하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왕정보고, 비인체제 이후부터를 이해해야 유럽지역을 배울 수 있다. 비인체제는 성격상 철저한 반혁명적, 반민족주의적, 반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영국을 제외한 열강들은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자국에 확산되어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 또는 생존권 확보 운동을 전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진보세력의 입헌군주제 주장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열강들과 갈등을 빚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비인체제를 종합해서 설명해 보면, 비인체제는 프랑스혁명 직전의 군주의 지배를 정당하다고 보는 정당주의와 대국간의 세력균형의 원칙에 의하여 유럽의 영토관계를 구획하고 구 지배자를 부활시켰으며, 보수적·복고적인 이 체제는 독일·이탈리아를 분열상태로 머물게 하고, 여러 소국의 이해에 대한 고려가 적을 뿐더러, 각 국의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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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6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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