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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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로마제국의 크리스트교 박해의 배경
1. 황제숭배사상
2. 박해의 법적 기초
3. 로마의 이교의식

Ⅲ. 박해를 받은 근거와 그 결과
1. 신약성서에서의 국가관
2. 예수와 시민과의 대립
3. 박해에 대한 대응

Ⅳ. 크리스트교 황제의 종교정책
1. Milano 칙령 이후의 이교
2. Constantonus 대제의 입법
3. 교회와 성직자의 특전

Ⅴ. 결론

본문내용

를 바치고 있는 성직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모든 강제적 공역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호될 것을 나는 한다.……신격에 바쳐질 봉사로부터 격리됨이 없이 오히려 아무런 불안 없는 자체의 법에만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의 주교재판권 부여의 칙법은 주교에게 민법적 係爭 관한 재판권을 부여한 칙법으로서, 318년 발포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으로는 '만고 공소가 주교법정에 대해서 이룩되었을 경우 (세속의)재판관은 침묵을 지킬 것이며 어떠한 사람들이 審理를 크리스트교의 법으로 다스려지기를 원한다면 설혹 心理가 (세속의)재판관에 의해서 시작되었더라도 그는 들어야 한다. 또한 그들에 의해서 재판된 모든 것은 신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크리스트교의 機構를 국가생활에 도입한 최초의 것으로 간주된다.
넷째는 교회에 대한 노예해방권의 부여를 기술한 칙법으로서 321년 발포되었으나 그 전에 여러 가지 권한이 부여된 바 있으며, 특히 320년에는 후세교회의 경제적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유산상속권이 부여된 바 있다. 노예해방권의 부여에 관한 칙법의 내용은 '만고 어떤 사람이 경건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 노예에게 적합한 자유를 교회 가운데서 부여했다면 형식을 취했을 경우에 로마시민권이 항상 합리적으로 부여되었던 것과 동일하게, 합법적으로 자유가 노예에게 부여되었다고 간주된다. 다만 주교의 판단에 의해서 (자유를)주어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해방될 수 있다.'고 기술되었다.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諸황제들이 교회에 대해서 주요한 특권을 부여하려는 것은 분명히 크리스트교의 정신에 입각한 공공생활의 관철이라고 하는 교회의 임무를 용이하게 달성시키려는 의도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미 성직자에게 군대의 민박 및 공공사업 부역을 면제하고 그 후의 황제들은 이것을 전제한 성당 및 성직자들에게 전면적으로 면세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상 크리스트교 황제의 종교정책은 다분히 異敎사상을 배경으로 했다고 보아지며 이 專制主義(Caesarismus)혹은 皇帝兼敎皇主義(Caesaro-Papismus) 더 나아가서는 Byzantismus(콘스탄티노플 천도를 평하는 Byzantium주의)라고 할 때, 시초의 순결한 교회의 방위자라는 입장에서 점차 정치와 종교를 혼동하는 면을 살필 수 있다.
Ⅴ. 결론
이상에서 로마제국의 크리스트교 박해에 대하여 고찰하였는 데 로마제국에서의 크리스트교박해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황제숭배는 권력의 절대화 내지는 신격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제국을 결속시켜 주는 절대적인 이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황제숭배의식은 유일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크리스트교도들에게는 우상숭배였던 것이고 제국의 입장에서 황제숭배를 거역한 제국의 반역자였던 것이다. 외래 종교라 할지라도 국가에 유해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종교적 충성을 바칠 것을 거부한크리스트교는 제국의 입장에서 커다란 위해 요소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박해는 국가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고 일반대중들도 다신교 숭배의 사회적 환경속에서 크리스트교도들의 신앙적 태도는 그들의 생업에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게 되었던 것이고 대중은 크리스트교도들을 납세 거부의 선동자 등의 명칭으로 제국에 고소하였던 것이다. 특히 재판을 함에 있어서 뚜렷한 증거법규없이 고백을 바탕으로 판결을 내려야 했던 행정장관들은 대중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러한 법제상의 문제점들이 크리스트교를 박해한 요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교도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크리스트교도들의 확신있는 신앙과 관행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 종교에 있어서의 부정적인 요소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신숭배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오직 그들 자신들의 신만을 섬기는 이러한 크리스트교도들의 유일신적 배타성은 諸神의 善意를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해치는 종교로, 로마 사회가 당한 災害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확신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트교도들은 박해에 대항하기 위해 순교로서 대응하였으며 순교자들은 머지 않아 신의 영광이 이 지상에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제국과 이교도들의 박해에 대해서 당당히 순교당하였던 것이고, 反로마적 사상과 反황제숭배사상은 크리스트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가중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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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30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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