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시대적 배경
Ⅱ. 혁명문학론의 대두
Ⅲ. 혁명문학론과 논쟁들
1)창조사와 태양사의 문학논쟁
2)혁명문학파와 노신의 논쟁
3)태양사와 모순의 논쟁
Ⅱ. 혁명문학론의 대두
Ⅲ. 혁명문학론과 논쟁들
1)창조사와 태양사의 문학논쟁
2)혁명문학파와 노신의 논쟁
3)태양사와 모순의 논쟁
본문내용
범을 축하했다.
이에 태양사에서는 錢杏邨이 《태양월간》제 3호에 <‘환멸’서평>(書評幻滅)을 발표하여 호평하였는데, 아마도 이것은 錢杏邨이 혁명시대를 맞아 새로운 작가 출현을 기대하다가, 茅盾의 등장에 크게 기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 《태양월간》제 7호에는 <‘동요’서평>(書評動搖)이 게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더욱 호평하고 있다.
茅盾은 세 번째 소설인 <추구>(追求)를 탈고하고 곧 일본으로 떠났으며, 일본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설명한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을 7월 16일에 썼다. 여기에서 茅盾은 당시 국내문단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였는데, 그는 혁명문학을 표어구호문학이라고 판정하고 과연 이런 표어구호문학이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했다. 그는 또 혁명문학이라는 ‘신작품’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혁명문학가들은 솔직히 인정하고, 실패의 원인을 찾아 개선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또 茅盾은 혁명문학이라고 하여 소자산계급을 배제시키고 압박받는 노고군중을 위하여 라는 거짓 구호만을 외치지 말고, 청년학생으로부터 소자산계급으로 점차 독서대상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의하였다.
錢杏邨은 1928년 10월 18일에 <‘추구’서평>(書評追求)를 발표하였는데 이전의 태도와는 달리 혹평하였는데, <추구>는 혁명시대의 색채는 띠고 있으나, 혁명적 창작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茅盾의 이 작품은 무산계급혁명으로서의 광명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錢杏邨은 곧이어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를 보고 茅盾에게 크게 실망한다. 그는 1929년 1월에 <도쿄에서 우한으로>(從東京到武漢)을 발표하여, 과거에 호평하였던, <환멸>, <동요>마저 반혁명적 작품이라고 혹평을 하고는 “그는 이제 정식으로 무산계급의 문예진영을 떠났다”고 탄식했다.
한편 창조사의 克興도 茅盾의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를 보고 <소자산계급 문예이론의 오류:마오둔군의 ‘꾸링에서 도쿄로’를 평한다>(小資産階級文藝理論之誤謬:評茅盾君的‘從嶺到東京’)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지는 錢杏邨과 같았다.
茅盾은 1929년 7월에 葉紹鈞의 장편소설인 <니환즈>(倪煥之)를 평하는 글인 <‘니환즈’를 읽고>(讀倪煥之)를 《문학주보》제 8기에 발표하면서,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에서 피력하였던 문학이론을 재론하였다. “小資本階級이 받고 있는 고통을 묘사하라”, “五四시대의 정신에 의하여 도시의 고통 받는 인생을 반영하라”고 하며, 무산계급문학이라는 비현실적 구호를 외치기보다 문학을 이해할 수 있고 문학에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인 소자산계급을 문학의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1930년 4월에 茅盾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좌련에 합류하면서, 이들은 동반자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으나, 이들이 품고 있는 근본 사상에서는 결코 합의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金時俊, 『중국현대문학사』, 지식산업사, 1992
오중걸,『중국현대뮨예사조사』, 신아사, 2001
문선규, 『중국문학사』,경인문화사, 1972
이에 태양사에서는 錢杏邨이 《태양월간》제 3호에 <‘환멸’서평>(書評幻滅)을 발표하여 호평하였는데, 아마도 이것은 錢杏邨이 혁명시대를 맞아 새로운 작가 출현을 기대하다가, 茅盾의 등장에 크게 기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 《태양월간》제 7호에는 <‘동요’서평>(書評動搖)이 게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더욱 호평하고 있다.
茅盾은 세 번째 소설인 <추구>(追求)를 탈고하고 곧 일본으로 떠났으며, 일본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설명한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을 7월 16일에 썼다. 여기에서 茅盾은 당시 국내문단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였는데, 그는 혁명문학을 표어구호문학이라고 판정하고 과연 이런 표어구호문학이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했다. 그는 또 혁명문학이라는 ‘신작품’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혁명문학가들은 솔직히 인정하고, 실패의 원인을 찾아 개선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또 茅盾은 혁명문학이라고 하여 소자산계급을 배제시키고 압박받는 노고군중을 위하여 라는 거짓 구호만을 외치지 말고, 청년학생으로부터 소자산계급으로 점차 독서대상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의하였다.
錢杏邨은 1928년 10월 18일에 <‘추구’서평>(書評追求)를 발표하였는데 이전의 태도와는 달리 혹평하였는데, <추구>는 혁명시대의 색채는 띠고 있으나, 혁명적 창작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茅盾의 이 작품은 무산계급혁명으로서의 광명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錢杏邨은 곧이어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를 보고 茅盾에게 크게 실망한다. 그는 1929년 1월에 <도쿄에서 우한으로>(從東京到武漢)을 발표하여, 과거에 호평하였던, <환멸>, <동요>마저 반혁명적 작품이라고 혹평을 하고는 “그는 이제 정식으로 무산계급의 문예진영을 떠났다”고 탄식했다.
한편 창조사의 克興도 茅盾의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를 보고 <소자산계급 문예이론의 오류:마오둔군의 ‘꾸링에서 도쿄로’를 평한다>(小資産階級文藝理論之誤謬:評茅盾君的‘從嶺到東京’)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논지는 錢杏邨과 같았다.
茅盾은 1929년 7월에 葉紹鈞의 장편소설인 <니환즈>(倪煥之)를 평하는 글인 <‘니환즈’를 읽고>(讀倪煥之)를 《문학주보》제 8기에 발표하면서, <꾸링에서 도쿄로>(從嶺到東京)에서 피력하였던 문학이론을 재론하였다. “小資本階級이 받고 있는 고통을 묘사하라”, “五四시대의 정신에 의하여 도시의 고통 받는 인생을 반영하라”고 하며, 무산계급문학이라는 비현실적 구호를 외치기보다 문학을 이해할 수 있고 문학에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인 소자산계급을 문학의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1930년 4월에 茅盾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좌련에 합류하면서, 이들은 동반자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으나, 이들이 품고 있는 근본 사상에서는 결코 합의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金時俊, 『중국현대문학사』, 지식산업사, 1992
오중걸,『중국현대뮨예사조사』, 신아사, 2001
문선규, 『중국문학사』,경인문화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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