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의식주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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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절 의식주생활
1. 식생활
2. 의생활
3. 주생활

제 2절 가정생활과 풍속
1. 가정생활
2. 풍속

제 3절 여가생활
1. 여가생활의 실상
2. 민속놀이

제 4절 종교생활
1. 종교정책
2. 종교활동

본문내용

는데 적지 않은 해독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에서의 불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까지는 북한의 종교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북한연구소에 따르면 북한정권 수립 이후 사찰 대부분이 관광지나 휴양소로 바뀌었지만 6·25이후 강원도 고성군 석왕사와 금강군 정양사 등이 복구됐고 1990년도 전후해 평양의 정릉사, 광법사 등이 복원되는 등 최근 들어 사찰복구작업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 금강산 4대 사찰가운데 하나인 장안사와 신계사가 복구될 예정이고 묘향산 일대의 계조암, 백운암, 평북 태천군의 화장사, 원적암 등도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의 불교는 조계종의 종파로 파악되고 있으나 승려들은 남한 조계종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대처승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들은 대부분 해방 전부터 승려생활을 해온 고령층으로 삭발하지 않고 머리를 길렀으며 평상시에는 양복과 구두를 신고 생활하다 절에서는 양복 위에 검은 두루마기에다 붉은 색 가사를 덧옷으로 걸친다고 한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반 북한주민들은 북에서는 이미 불교가 없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최근 남북대화나 대외선전용으로 일부사찰을 복원하였고 스님들을 배치했다고 한다. 북한사람들은 스님이라는 용어대신 '중'이나 '중님'으로 부른다. 이들은 행사가 있으면 절에 올라가 대기하고 있다가 별다른 일이 없을 때에는 절에서 내려와 자기 볼일을 보기 때문에 이들을 "출퇴근 중"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불교도연맹은 1945년 12월 26일 결성된 북조선 불교도연맹을 모체로 한 북한 최초의 종교단체로서 1965년경 잠적했다고 1972년 출현했다. 1988년 5월에 최초로 묘향산 보현사에서 석탄절 기념법회를 개최한 이후 매년 불교의 3대 기념일인 성도절, 열반절, 석탄절에 각지의 사찰에서 기념법회를 열고 있다.
1993년 말 현재 60여 개의 사찰에 300여명의 승려(대처승)가 있으며 전국에 10만명의 불자가 있다고 북한은 주장한다. 1989년에는 승려양성을 위한 불교학원을 설립했다. 주요 사찰로는 묘향산의 보현사, 평양 대성산의 광법사, 금강산의 표훈사 등이 있다.
3) 기독교
북한의 '정치용어사전'은 기독교를 "피착취 근로대중의 해방투쟁을 말살하고 착취제도를 영구화하기 위한 착취계급의 정신적 무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는 봉건적 착취와 위계제도를 신성화하는 정신적 수단이었으며 온갖 선진사상과 과학의 흉악한 원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18세기부터 선교사들을 침략의 앞잡이로 내세워 조선인민들에게 종교적 무저항주의, 숭미사상을 불어넣으면서 침략의 기반을 닦았으며 오늘날 남조선에서는 미제의 식민지 예속정책을 변호하고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정신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북한주민에게 교육하고 있다.
해방후 북한으로 들어온 김일성이 공산체제수립과 절대권력수립, 개인우상화를 추진하는데 기독교가 가장 큰 걸림돌로 간주되었다. 그 당시 북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확장속도가 빨랐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 역시 타종교에 비해 심하게 진행되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일정한 구역이 설정된 산간오지로 추방되었으며 1960년부터 체계적으로 생겨난 정치범수용소에 모두 수감되었다. 따라서 많은 실향민 중에는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 피난 온 기독교인들이 유난히 많다.
1980년 이후 북한의 종교정책이 미래지향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1988년과 1989년에 평양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형식적으로나마 북한의 종교정책, 특히 기독교에 대한 과거의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표면상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으로 파악된다.(부록)
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46년 11월 28일 창립된 북조선기독교연맹이 모체로서 1960년에 잠적했다 1974년 다시 등장했다. 1993년 말 현재 2개의 교회와 500여 개의 가정교회가 있으며 30여명의 목사, 그리고 130여명의 전도사(책임지도원)가 활동하고 있다. 성경은 1990년에 만들어진 신·구약 합본을 사용하고 있다. 찬송가의 경우도 그해 4월 만든 찬송가(401곡 수록)를 사용하고 있다. 목사 양성기관으로는 1972년 개원한 평양신학원이 1992년까지 3년제로 7기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다가 중단됐으며 2000년 9월 다시 개원하였다.
4) 천주교
북한의 '정치용어사전'이나 '조선말사전' 등에는 카톨릭교(천주교)를 그리스도교와 같은 수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카톨릭교 역시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인민들의 투쟁의욕을 마비시키고 착취계급에게 복종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취급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른 종교에 비해 정치적인 목적이나 중요도에서 덜하다고 판단되었는지 북한에서는 가장 늦게 1988년 6월 30일에 조선천주교인협회(현 조선카톨릭교협회)가 평양에서 결성되었다. 당시 결성취지는 "과거 천주교인들의 단체가 없음으로 하여 천주교인들을 대변하는 문제와 각국의 천주교인 및 단체와 연대하고 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제한성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타 종교단체에 비해 정치적인 색채가 덜한 것으로 보아진다. 실제로 카톨릭교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 된 것은 1987년 6월 평양에서 개최된 비동맹 특별각료회의이다. 이 회의에 바티칸 대표단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대표단 가운데는 서울대교구 사목연구실장 장익 신부가 포함되어 북한 당국과 직접적인 접촉을 갖게된 것이다. 장익신부는 장충성당이 건립된 지 한달 만인 1988년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아 봉헌했다.
조선카톨릭교협회의 지방조직은 아직 구성되지 못했으며 중앙조직만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북한의 종교단체는 조선노동당 하부조직에 불과하며 평양에만 대남, 대외관련 부분으로 분리되어 운영될 뿐 지방조직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천주교의 특성상 신부와 수녀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북한에는 이들까지는 위장시키지 못한 것 같다. 현재 북한 유일의 장충성당에 등록된 신자는 모두 3000여 명이며 보통 60∼70여명의 신자가 미사에 참석하며 신도 대표 2명이 미사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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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3.27
  • 저작시기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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