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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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나일본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1) 임나일본부설이란?
2) 임나일본부설의 정치적 배경
3) 임나일본부 근거자료
4) 임나일본부의 제설

3.결론

본문내용

사(산미행구)의 비판에 의하면 이노우에(정상)가 문헌적 증거로 사용하였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사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말미암은 것이 확실하다.
(3) 분국설(분국설)
1963년에 북한의 김석형(김석형)에 의하여 제기된 이른바 '분국설'은 '임나일본부'의 문제 뿐만 아니라, 고대한일관계사에 관련된 일본학계의 기본적인 발상을 완전히 뒤엎는 혁명적인 연구였다. 선사시대 이래 삼한 삼국의 주민들은 일본열도에 이주하여 각기 자신들의 출신지와 같은 나라를 건국하여 모국에 대하여 분국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이들 분국들 중에는 가야인들이 현재의 히로시마(광도)동부와 오카야마(강산)에 걸치는 지역에 건국한 임나국(임나국)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임나국을 중심으로 서부에는 백제계의 분국이, 동북쪽에는 신라계의 분국이, 동쪽에는 고구려의 분국이 각각 위치하였으며, 또한 동쪽으로는 '대화정권(왜)'이 위치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이 임나국을 중심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 왜가 서로 각축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의 가야지역과는 전혀 무관하며, 일본열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서 규정지었다. 즉 '대화정권(대화정권)'이 5세기 중후엽에 서부일본을 통합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가야계 분국인 임나국에 그 통치기관을 설치하였던 것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것이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진출론을 완전히 거꾸로 하여 고대 한국의 일본열도진출론을 확립하고, 같은 맥락에서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 연구결과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도 적지 않으나, 고대한일관계사의 연구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으며, 기본적인 발상에 대한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였던 의미는 크게 평가하여 좋을 것이다.
(4) 백제군사령부설(백제군사령부설)
과거 일본의 '출선기관설'에 대한 북한학계의 비판이 '분국론'이라고 한다면, 한국학계의 본격적인 비판 및 대안의 제시가 천관우(천관우)에 의해 이루어 졌다. 천관우는 가야사의 복원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선행시켰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가야) 관련사료 중에 '일본'이 주체로 묘사되어 있는 기사들 가운데에는 백제를 주체로 바꾸어 놓아 보면 사리에 맞게 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고 전제하였다. 4세기 말 경에 왜가 '가라칠국(가라칠국)'을 점령하였다는 기술에서 보이는 역사적 사실이란 백제의 가야제국 정복이라고 해석하였으며, 6세기 중엽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란 다름 아닌 '임나백제부(임나백제부)'와 같은 것이었으며, '임나백제부'는 백제가 군사적 목적으로 가야지역에 설치하였던 군사령부와 같은 성격으로 해석하였다.
다만 이러한 해석에서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군사적 행동이 이해될지는 모르겠으나, 백제의 군사행동에 보이는 왜병의 활동이라든지, '임나일본부'의 관련기사에서 보이는 왜계통의 인명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이러한 왜병의 존재와 왜계통의 인명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하였던 것이 김현구(김현구)의 연구였다. 김현구는 백제군과 같이 움직이는 왜병의 성격을 용병과 같은 성격으로 보고, 이러한 용병은 백제가 왜에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던 반대급부이며, 왜계통의 인명은 일찌기 일본열도에서 백제에 이주하여 백제왕의 신하 노릇을 하고 있었던 왜계통의 백제인이라고 규정지었다.
(5). 외교사절설(외교사절설)
이상의 연구들은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해석을 전개하고 있으면서도, '임나일본부'를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정기관과 같은 관청이나 기관의 성격으로 이해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의 관련사료에 의하는 한 통치나 군사적 역할을 찾아 볼 만한 기술은 전혀 없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면서 주관적 시각의 연구를 지양하면서,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에 관련되는 사료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바탕으로 보다 객관적인 실체규명의 연구가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즉, '부(부)'라고 하는 표기는 『일본서기』가 주장하고자 했던 역사관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부(부)의 원형이 '미코토모치(어사지)'임을 확인하고, '미코토모치'의 실체가 기관이나 관청이 아닌, 사신(사신)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를 임나에 파견되어진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1970년대 부터 쓰즈키야스타미(영목정민) 우케다마사유키(청전정행) 오쿠다쇼우(오전상) 키토우키요아키(귀두청명) 등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근년의 한일고대사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해석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Ⅲ. 결론
종래 한일학계의 연구에서 왜나 백제를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은 가야제국의 자체적 발전론이나 이해관계를 전혀 도외시하였던 시각이었으며,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었다기 보다는 '일본학계의 막연한 선입관과 한국학계의 감정적 반발'의 산물이었다. '임나일본부'와 '안라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은 아니었으며, 임나와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키비노오미(길비신)와 카와치노아타히(하내직)가 그 실체였다. '일본부'들의 활동이란 가야제국의 왕들과 공동의 보조를 취하여 백제 또는 신라와의 외교교섭에 참가하였던 것이 전부였다.
백제는 동쪽 신라방어선의 안정이라는 목적을, 왜는 선진문물 수입의 창구유지라는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야지역에 관여하였고, 그를 위해 '일본부'들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일본부'들은 서부가야왕의 후예이며 가야 사람인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의 통제에 따르고 있었다. '일본부'들의 외교활동 내용이나 그 주장들을 보면, 동부의 신라와 서부의 백제의 침략에 대해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가야제국의 이해관계와 일치되는 것들 뿐이었다.
가야제국의 왕들은 자국의 독립유지를 위하여 백제 신라 왜를 대상으로 하는 외교교섭의 전면에 '일본부'들을 전면에 내 세움으로써 왜와의 관계를 원활히 함과 동시에, 백제와 신라에 대해 왜의 세력이 가야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보여 백제와 신라의 침략을 외교적으로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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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6.02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9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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