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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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역사의 흐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조몬시대

야요이시대

야마토시대

나라시대

헤이안시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시대

메이지시대

본문내용

소 병기공장 광산 생사공장 면사방적공장등, 많은 관영공장을 만들어, 정부의 공부성 내무성을 통해 산업을 보호 육성하였다.
또한 교통통신의 발달을 위해 1871년에 서양식 우편제도를 발족시키고 1872년에는 철도를 부설하였고, 알본근해의 해운권의 확립과 군사수송을 위해 해운회사를 보호하였다. 또한 원전을 단위로 하는 새 경화를 만들고 국립은행을 설립하였으며, 1882년에는 일본은행을 만들어 금융과 지폐발행을 맡긴다.
그러나 재정부담에 허덕이던 정부는 1880년대에 민영공장이 성공하자, 관영공장을 불하하고 민영 사업을 보호하였다. 따라서 1890년대에는 식산흥업정책의 일환으로 민영의 방적 철도회사가 계속 설립되었으며, 미츠이(三井)이와자키(岩崎, 후에 三菱)등과 같은 정상(政商)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신정부는 국민들의 문명개화 교육을 위해 1872년 학제를 제정하고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또한 문부성을 신설하여 소학교 교육에 주력한 결과 전국에 2만이상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국립대학에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학문의 발달을 꾀하였으며, 사범교육 여자교육 산업교육을 위한 전문학교도 설립하였다. 한편 케이오(慶應)의숙, 도시샤(同志社)등의 사립학교도 세워졌다. 또 구미 선진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구미로부터 학자,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서양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1873년부터는 태양력을 채용하고, 1일 24시간, 1주7일제, 일요휴일제를 확립하였다. 단발과 군인관리들의 양복착용을 추진하였다. 대도시에서는 벽돌집에 가스등이 늘어선 가로를 마차와 인력거가 달려가는 모습이 새로운 풍물이 되었다.
신정부는 신도(神道)의 국교화를 추진하면서 크리스트교 금지를 해제한다. 사상계에서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천부인권사상 등의 서구근대사상이 유행하였고, 1870년 일일신문(橫濱每日新聞)이, 1873년에 잡지(明六雜誌)가 등장하여, 봉건사상의 배제와 근대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71년이후의 불평등조약 개정교섭은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제도를 갖추지 못 하였다는 이유로 실패한다. 1871년에는 청과도 조약을 맺었으나, 류큐왕국의 귀속을 둘러싸고 청과 일본은 대립하게 된다. 메이지정부는 류큐왕국을 류큐번(藩)으로 하고, 류큐어민 피살 사건을 핑계로 1874년 대만에 출병하여 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낸다.
한편 메이지 초기 개국요구를 거절한 조선에 대한 정한론(征韓論)이 등장하였으나, 국내개혁 선행론에 패배하고 정한론자는 정부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1875년 메이지정부는 무력시위로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다음해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어 개국시켰다. 또한 러시아와 국경에 관한 조약을 맺어 일본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구미의 근대사상이 소개되자 국민들 사이에 자유 평등 인권사상이 전파되어, 전제적인 번벌정치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타가끼 타이스케(板垣退助)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 자유민권운동을 시작하여 1881년에 일본에서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을 만들었다. 또 다음해 오오꾸마 시게노부가 영국식 의회주의를 주장하며 입헌 개진당을 만들었다.
1889년, 메이지천황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독일 헌법을 모델로 하여 만든 헌법 초안을, 대일본제국헌법으로 공포하고, 다음해인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했다. 이 헌법은 천황밑에 내각 재판소 의회를 두고, 행정 사법 입법의 3권분립의 형태는 취하고 있지만, 천황 주권인 헌법이기 때문에, 내각은 천황에 대해서만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육해군은 천황 직속이기 때문에, 내각이나 의회도 이를 견제할 수 없다. 국민의 권리는 일단은 인정되어져 있으나, 그것을 제한하는 법률이 있어서 자유는 엄격하게 통제되어져 있었다.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을 제한하는 시스템이었다.
1890년 7월, 최초의 중의원 선거가 행해지고, 11월에 의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는 일정한 세금을 내는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선거권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1%만이 투표할 수 이었다.
메이지정부는 근대산업 발달에 노력하면서, 해외진출도 고려하게끔 되었다. 우선 우리나라를 개국시켜서, 일본제품을 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는데, 당시의 우리나라는 청국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청국의 대립이 심화되어갔다. 1894년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당시의 조선정부는 청국에게 출병을 의뢰하자, 일본도 출병,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단기간에 승리를 거두고, 다음 해 시모노세끼 조약을 체결,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요동반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곧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되돌려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를 중국에 되돌려 주었다. 그 후 만주에서 조선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러시아와, 반대로 조선에서 중국대륙으로 나아 갈려고 하는 일본과의 대립이 점점 더 격화되었다. 한편, 영국과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2년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전쟁시에는 서로 돕기로 약속하고, 1904년 러일전쟁을 개시했다. 러시아에서는 국민이 전쟁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 데다가, 러시아혁명이 격화되고 있었고, 일본도 전쟁에 이기기는 했지만,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경제적 여유가 없게 되어, 1905년 미국의 중재로 포오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 결과, 일본은 사할린 남쪽반과 남만주철도등을 얻었다.
그 후, 일본은 1906년 중국에 남만주철도회사를 세우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메이지정부 최대의 외교문제였던 조약개정중에서, 치외법권이 청일전쟁 직전에 철폐되고, 러일전쟁후에 관세자 주권을 회복했다.
② 메이지시대의 문화적 특징
- 이 시기의 일본 문화는 서양의 선진 문화를 대폭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사물에 대한 사고와 안목을 넓혀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수주의(國粹主義)적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키워드

일본,   문화,   사회,   정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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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17
  • 저작시기2006.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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