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사회 그리고 동학과 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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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사회 그리고 동학과 서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말
1.18~19세기 조선의 시대상황과 사상의 흐름
2.서학.천주교의 도입
-18세기의 서학.천주교
-18세기의 서학.천주교
-서학.천주교의 성격, 영향
3. 동학의 등장
-동학의 사상적 측면
-동학의 전개 및 봉건정부의 대응
4. 농민들의 수용
5. 마치는 말

본문내용

은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을 띤 것이며 민중의 공격심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외국세력에 대한 배타적인 구호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교조 최제우는 기독교를 비판하였지만 배타적인 감정을 드러낸 바는 없으며 합리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수용하려는 관용을 보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와의 갈등은 없었고, 그 배후에 있는 서구 세력을 자극하지 않았다.
최제우가 민중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원인을 요약하면 첫째로 민중의 전통적지지 기반인 토착 신앙과 주술을 메시지화한 점, 둘째로 민중의 정신적 공동을 포착하고 체계화한 토착 신앙을 그 자리에 메워 넣은 점, 셋째로 원초적이고 잠재적인 외국세력에 대한 혐오감을 공격 지향의 배외감정으로 상승케 하는 메시지를 발한 점을 들 수가 있겠다.
최제우는 사회 변혁의 당위성이 제기되는 조선 사회의 실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어 단순한 도당적(徒黨的) 성격의 저항운동이 아닌, 범민중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사회 개혁의 요청이 불가피함을 포괄적인 사상 체계로 구성하였다. 제2세 교주 최시형은 정규적인 학문 수학의 배경을 갖기 못하여 학문의 영역이 한정되어있었다. 그러나 그가 동학 교단을 지도한 후부터는 원시동학의 형태를 벗어나 교리나 조직면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동학의 세력을 신장하는데 있어 최시형은 원시동학의 사도적(邪道的) 방황 시대에서 조직 종교로, 동학도를 조직 종교로 정비하고 제도화하였다. 이는 이전의 잠정적인 대중 집회 성격에서 탈피하여 수도적 사명을 띤 종교 공동체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며, 갑오동학혁명의 엄청난 동원력의 에너지를 축적하게 되고 최시형은 폭력적인, 혹은 대중 운동으로 조직이 노출되어 괴멸당하는 것을 우려하여 지하의 비밀 집회를 위주로 세력을 육성해 나갔다.
Ⅴ. 마치는 말
우리는 위에서 조선 후기 사회모순으로 인해 도입 혹은 발생된 서학·천주교, 동학으로 인하여 그 당시 사회에 불러일으킨 사상동향을 살펴보았다. 18세기 이후 조선후기 사회에서도 집권층의 국가운영원리로서 주자학이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는 내적 발전의 결과 주자학 이외의 새로운 사상의 출현이 요청되었고, 이 과정에서 실학사상이 출현하기도 했다. 실학사상은 조선왕조를 이끌어나갈 지배이념을 주자학이 아닌 원초유학(原初儒學)의 틀 안에서 찾아보려던 사상운동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의 극복을 염원하던 민중들은 주자학 자체에 대한 거부의 의사를 견지하면서 새로운 사상운동에 투신해 갔다. 그들은 이 사상운동을 통해 상호 결속을 시도하면서 사회의 변혁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전후의 민중들과 일부 지식층들은 유학의 틀 자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모색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18세기 말엽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이 전파될 수 있었고, 19세기 중엽에 동학사상도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서학이나 동학사상은 모두 민중종교운동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서학은 조선후기 19세기 전후의 사회에서 전파되어 갔다. 이 사상은 인간 존엄성을 강조했고, 일종의 평등사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19세기 중엽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에서도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주장했다. 이는 반상(班常) 혹은 적서(嫡庶)의 차별, 남녀노소, 빈부의 차별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을 하늘처럼 받들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또한 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선언이었고, 신분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뜻했다. 이 두 사상은 모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 현상이었다. 서학과 동학은 당대 민심이 지향하던 소망을 수렴한 사상이었다. 서학과 동학은 모두 불평등한 사회제도로 인해 피해를 강요당하던 민중들에게 환영받게 되었다. 이 두 사상은 조선후기 사회와 사상의 발전에 일정하게 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동학의 발생초기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사학(邪學)의 일종으로 파악하고 이를 탄압했다
그런데 서학과 동학은 상호간 약간의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차이점도 컸다. 즉, 서학은 인간의 보편성과 함께 문화 내지는 가치의 보편성을 인정하던 입장이었다. 반면에 동학은 조선사회가 처해 있던 19세기 후반 조선의 상황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찾고자 했다. 그리하여 동학은 최제우 단계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반(反)서학적, 반(反)서양적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다.
한편, 1890년대 사회에서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강화되어 갔다. 또한 조선의 사회에서도 동학운동이 더욱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동학은 반(反)침략운동 내지는 반(反)서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동학도들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경향은 반(反)천주교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의 과정에서 전라도 지역의 교회는 동학농민군들로부터 적지 않은 피해를 당했다. 이 지역에서 선교하던 프랑스 선교사가 전쟁의 와중에서 피살당하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천주교측은 동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상당 기간에 걸쳐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포교활동이나 동학운동은 변혁기라는 당대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활발히 전개된 일종의 민중의 신앙운동이었으며, 다음시대의 종교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 선구자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도서>
강삼재, 『조선의 西學史』, 민음사, 1990
고성훈 외, 민란의 시대, 가람기획, 2000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35, 조선 후기의 문화, 1998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38, 조선 후기 민중, 1998
금장태,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 』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김태웅, 「서구자본주의의 침투와 위기의식의 고양」 『한국사』10 한길사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조선후기문학의 양상, 이회, 2001
민족문화연구소, 『동학사상의 새로운 조명』, 영남대학교출판부, 1998
박찬승, 「'근대'와 '제국'-그 도전과 대응」
신일철, 『동학사상의 이해』,나남, 1995
정옥자, 조선 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3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상사의 과학적 이해를 위하여』 청년사
한우근, 「동학의 성격과 동학교도의 운동」 『한국사』17 국사편찬위위회
황선명, 「신앙운동으로서의 서학과 동학」『민중종교운동사』 종로서적
동학과 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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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10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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