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과 메이지유신의 비교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갑오개혁과 메이지유신의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메이지유신과 갑오개혁 : 그 성격과 의의 비교
1. 메이지유신
2. 갑오개혁

Ⅲ. 메이지유신과 갑오개혁 : 주동세력 비교
1. 메이지유신
2. 갑오개혁

Ⅳ. 메이지유신과 갑오개혁 : 개혁내용 비교
1. 메이지유신
2. 갑오개혁

Ⅴ. 메이지유신과 갑오개혁 : 대외관계 비교
1. 메이지유신
2. 갑오개혁

Ⅵ. 결론

본문내용

의 공동간섭인 삼국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내각 대신들, 특히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되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민씨일파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되었다. 박영효가 실각된 후 온건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내각인 김홍집 내각이 다시 성립되었지만 이때 명성황후가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 침략자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들 개혁시기를 보면 일본은 대외 침략을 통해서 국제질서에서 강대국에 편입되어 하나의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능동적 자세를 보여주는 반면 조선은 외세의 힘을 빌려 난국을 타개하려는 수동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조선은 위치상 대륙과 해양의 사이에 있는 반도적 위치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리나 일본은 개혁 당시 제국주의 세력들은 일본보다는 중국에 관심이 많았고, 그에 따라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에 간섭을 덜 받았다는 것이 메이지유신기 외교의 한 특징이다.
Ⅵ. 결론
외세가 개입된 상태에서의 갑오개혁은 1895년 을미사변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운동과 1986년 고종의 러시아공관으로의 피신으로 인해 개화파정권의 붕괴와 함께 중단되었다. 사실상 개혁이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근대화의 실패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왜 일본이 조선보다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첫째, 메이지유신이 갑오개혁보다 적극적이었다. 메이지유신은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고, 위로는 천황으로부터 아래로는 일개 국민까지도 개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주도세력들은 기존의 막부세력을 타도하고 그들을 주체로 하여 개혁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반대자없이 신속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일본의 간섭에서 시작된 개혁이었고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위에서 아래까지 간 것이 개화파 관료들에 의한 위에서 멈춘 개혁이었다. 집권측의 정치적 소신과 집단이 달라 국익보다 각 집단의 이익만 지키려는 안이한 태도에 따라 후원하는 주변국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둘째, 개혁자체의 효율성 문제이다. 일본은 효율적인 개혁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었고, 개혁자체도 사회전반에 걸쳐 있었다. 즉 위에서 아래부분까지 하나가 되어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추진하였다. 부국강병책은 정치, 경제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문명개화정책은 사회, 문화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헌법제정과 외회설립은 정치제도의 근대화를 통해서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정책의 경우 일본의 필요에 의한 불안전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갑오개혁이 갑신정변이래 변법개화파가 추진해 오던 노선을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전통적인 통치질서를 근대서양과 일본에 맞추게 되었으나, 실제로 국가와 국민의 주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국방과 의회제도에 대한 배려가 없고, 일본의 조종을 받고 있는 내각에 실권을 몰아주어 일본이 간섭할 수 있는 공산을 넓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면의 경우도 일본의 경제침투에 용이하게 되어있다.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조세제도나 토지제도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도 이 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
셋째, 대외관계측면이다. 두 나라는 외국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었고 거의 비슷한 내용에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은 불평등조약개정 등 외세에 대해서 능동적 외교를 추진하였으나 조선은 외세에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외교를 펼쳐서 식민지국가로 전락하였다.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본보다 중국에 더 관심을 가고 있다는 것은 일본의 근대화에 큰 도움이 됐다.
두 개혁은 시기가 각기 틀리고 주체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개혁의 차이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개혁에 대한 민중들의 대응방안이다. 전과 다른 체제의 변화를 위해서는 전계층의 힘이 필요하다. 이에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더라도 민중들의 수용자세에 따라 개혁의 성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근대화를 일구기 위해 필요한 전단계인 메이지유신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해도 농민의 이해와 동참이 없었다면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근대화에 대한 관심이 민중들에게까지는 전달되지 못한 몇몇의 지배층만에 의한 개혁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의 근대화에 대한 인식이 개혁의 성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00. )
세계사의 흐름으로 본 메이지유신
일본 근현대사
동학농민운봉기와 갑오경장
한국사 강좌
바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한국사 강해
한국사 통론
  • 가격1,5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5.07.04
  • 저작시기2005.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606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