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교육사상과 민족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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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하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교육사상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초기 사회주의 교육사상과 교육운동
1. 해외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교육사상
2. 사회주의 사상 속의 마르크스주의

III. 학생사상 속의 마르크스주의 교육사조
1. 해외 유학생과 마르크스주의 교육사상
2. 마르크스주의 교육사상과 학생운동

IV. 진보적 지식인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
1. 마르크스주의 역사관과 지식인논쟁
2. 재야교육사상 속의 마르크스주의
3. 마르크스주의 교육사상의 양면성·민족과 계급, 그리고 전향

V. 결론

본문내용

용은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편, 『마군정하 한·일교육법제연구』, 1996, 제Ⅳ장을 참조하기 바람.
20) 192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다카바타케 모토유키(高전素之)를 중심으로 하는 볼세비키주의자와 오스키 사카에(大杉榮)를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논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양쪽 진영은 학술잡지 및 기관지를 통해서 각자의 입장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문헌에 대한 해석 및 내용을 소개하였다. 재일 조선유학생들은 대체로 이런 기관지와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할 수 있었다(古田光 編, 『近代日本社會思想史Ⅱ』(東京 : 有斐閣, 1971), pp. 21 - 38. 참조).
21) 일본에서의 마르크스주의 원전 출판은 1920년 다카바타케 모토유키(高전素之)가 번역·출판한 『자본론』 제1권 제1책이 간행되면서부터였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물이 총서, 전집형태로 출판되고 기타 마르크스주의 문헌들이 집중 소개된 것도 대략 1925년을 전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高田光 編, 前揭書, pp. 31 - 32.).
22) 임대식, 「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 앞의 책, 163쪽.
23) 윤종혁, 「일제하 항일학생운동 및 민족교육운동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24 - 26쪽.
24) 1923년 이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서 조선 국내에 공산당 조직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조직 운동의 구성원들은 주로 화요회계와 북풍회계 등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이념을 지향하는 전문적 공산주의자들로서 러시아를 통한 직접적인 사상 수용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조직원 중의 김재봉·김찬·신철·박헌영 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서 레닌주의적 문헌들을 비공식적으로 국내에 반입·수용하도록 하였다(이에 대해서는 우동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코민테른 -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편,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을 참조할 것.). 이들의 조선공산당 조직운동 과정에서 청년과 학생층을 지원하는 단체활동으로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그 구성원들이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중심 멤버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25) 朝鮮總督府, 『高等警祭要史』, 1920, pp. 150 - 151.
26) '학생 마르크스주의'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오는 용어로서, 조직적이고 직업적이기 보다는 순수한 학생의 정열과 이성으로서 권력체제에 대응하는 이념적 방식을 지칭한다. 이런 관점에서 1920년대 후반 이후 조선의 학생운동은 원칙론적인 방식을 고수하면서 조직활동과 대중운동을 분리하는 '코민테른'의 수정된 테제에 동의해 가는 것이기도 하였다(홍석률, 「일제하 청년학생운동」, 『한국사15 - 민족해방운동의 전개(1)』(한길사, 1995)를 참조할 것).
27) 김동춘, 「1920년대 학생운동과 맑스주의」, 역사문제연구소 편 『역사비평』 89년 가을호, 173 - 176쪽.
28) 1920년대 대표적인 동맹휴학으로서 1926년 6·10학생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내건 슬로건에는 대체로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식민지 차별교육 철폐',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의 목표를 공통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교육의 철폐를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한국교육연구소 편, 앞의 책, 198 - 203쪽 참조).
29) 1925년 11월 25일 일본의 교토대학학생연합사건을 계기로 해서 일본 치안당국은 치안유지법을 새로 제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법은 일본내 마르크스주의자, 특히 일본 거주 조선인 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 국내의 사안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 사회내에서도 사회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를 견제하기 위한 최악의 '악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久保義三, 『昭和敎育史·上』(東京 : 三一書房, 1994), pp. 63 - 109. 를 참조할 것.).
30) 조동걸, 「한국근대 학생운동조직의 성격 변화」, 『한국근대 민족주의운동사 연구』(서울 : 일조각, 1987), 362쪽.
31) 방기중,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 89 - 90쪽.
32) 김용섭, 「일본·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사 서술」, 『역사학보』제31호, 1966, 134쪽.
33) '아시아적 정체성 이론'은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일본 사회의 성격 논쟁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바로 일제 관변사가들의 식민지 옹호론과 결합하여 1930년대 일본 학계에서 대규모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윤종혁, 「근대 한·일 공교육사상의 비교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참조할 것).
34) 白南雲, 前揭論文, p. 304.
35) 이에 대한 당시 조선 사상가들의 사회성격논쟁은 오미일 편, 『식민지시대 사회성격과 농업문제』(서울: 풀빛출판사, 1991), 11 - 49쪽. 참조할 것.
36) 李北滿, "帝國主義治下に於ける朝鮮の敎育狀態", 『新與敎育』1933, pp. 4-5, 41.
37) 李北滿, 前揭書, p. 46.
38) 1924년 '조선청년대회' 토의사항,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2』(서울: 청계연구소, 1986) 145쪽.에서 재인용.
39)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於同盟休校考祭」, 1929, p.47.
40) 1926년 9월 제3차 조선공산당 당대회 결의안, 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227-228쪽.에서 재인용.
41) 사공표, 「조선의 정세와 조선 공산주의자의 당면 임무」(1929), 배성찬 편역, 『식민지시대 사회운동론 연구』(서울 : 돌베개, 1987), 128쪽.
42) 이재유,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1935), 신주백(편),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론 연구Ⅰ』(서울 : 샛길, 1989), 86-87쪽.
43) 차석동, 「민족개량주의의 반동적 도량을 분쇄하라」(1931), 배성찬 편역, 앞의 책, 1987, 282-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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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8.09
  • 저작시기2005.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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