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문제와 과거사청산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친일파문제와 과거사청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첫 번째, 친일파의 인물들
①이완용 한일'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page....1
②박제순 '을사조약' 체결에 도장 찍은 외교책임자 page....4
③권중현 친일로 한평생 걸은 대세영합론자 page....7
④이지용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미친 백작 page....9
⑤이근택 근황주의자에서 친일매국노로의 변신 page....13
⑥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page....17
⑦이용구 친일 망동조직 일진회의 선봉장 page....21
⑧윤시병 만민공동회 회장에서 일진회 회장으로 변신 page....26
⑨윤갑병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친일 출세주의자의 전형 page....28
⑩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page....29

두 번째, 친일 과거사 청산 page....34

세 번째, 친일파와 과거사 청산에 따른 나의 comment page....35

본문내용

는 자는 역사의 준엄한 벌을 받을 뿐이다.
일제로부터 광복을 되찾은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때 친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역사적인 숙청은 이뤄져야 한다. “늦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라는 서양 격언처럼 이제라도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역사정리가 아니라 우리 나라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작업이다.
-전주에선 수당문철거 행사-
지난 19일 중앙언론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전북 전주에서 아주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이 지역의 대표적 친일 잔재물인 전주종합경기장의 현판인 수당문(秀堂門)이 철거된 것이다. 만주국 명예총영사, 중추원 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 등을 지낸 수당(秀堂) 김연수는 동아일보 설립자인 김성수의 동생으로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1944·1·19)에 기고한 글에서 “학병에 입대하여 죽을 때에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에야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대표적 친일파였다. 그런데 그의 아호를 딴 현판을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상호 합의하여 떼어낸 것이다. 수당문 철거는 어쩌면 과거사 청산의 작은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청산을 내재적으로 자각하는 큰 걸음이다.
세 번째, 친일파와 과거사 청산에 따른 나의 comment
이 리포트를 쓰는 내내 답답하고 화가 나서 화병이 나지 않은 게 정말 다다행이다. 친일파 대표적인 인물 이완용과 그와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 이를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이 리포트를 쓰는 중에 고2 동생이 친일파가 뭐냐고 물어본다. 나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나도 고등학교 때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렇게 알고 보니 정말 색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우선 동생에게 “나쁜 놈”들이야 하고 이야기를 해뒀다. 그래 그들은 정말 나쁘다. 하지만 왜 그렇게 나쁜 짓을 해서까지 해야만 했을까? 친일파 이 리포트를 쓰는 중에 그렇게 까지 했던 것은 일본의 강압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솔직히 나라를 파는 것 보다 내 한 몸 희생해서 나라를 되찾아야하지 이런 생각도 있었을 터인데... 생각해보면 좀 답답한 마음과 어쩔 수 없이 뭐 이런 양가감정이 들기도 한다.
또한 그래서 친일파가 욕을 먹는다는 것은 친일파 후손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한 것을 보면 더욱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송병 준과 이완용의 후손은 땅을 되찾고자 소송을 해서 시가 60억원에 해당하는 2,000평을 되찾는 등 화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유권 재산” 그게 뭐가 중요한 법이라고 마음 같으면 후손들은 낙인을 찍어서 못살게 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후손이 무슨 죄랴 하는 생각도 들고 정말 안타깝다. 이러는데 우리는 정말 친일파 청산을 할 수 있는 걸까? 정말 많은 의문점들이 남게 된다. 위의 글을 위의 글 전북대 송기도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정말 전주의 수당문철거를 한 것처럼 친일파 청산의 큰 발걸음을 걷고 있는지도 정말 의문이다.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친일파 청산을 할지 정말 답답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대로 더 이상 보고만 있어야 할 문제가 아닐 듯싶다.
-------참고 문헌------------
강만길(고려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이완용, [경고문], {매일신보}, 1919.4.8 / 5.30.
大垣丈夫 編, {朝鮮紳士大同譜}, 1913.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김명수, {일당기사}, 일당기사출판사, 1927.
■ 김도형(계명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한규설 {참정대신 강석 한규설 선생 소전}.
小松 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 서영희(서울대 강사·한국사)
■ 참고문헌
鄭喬,{大韓季年史}
大村友之丞,{朝鮮貴族列傳(1910)}
細井肇,{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1910)}
■ 서영희(서울대 강사·한국사)
■참고문헌
黃 玹,{梅泉野錄}.
尹孝定,{風雲韓末秘史}.
鄭 喬,{大韓季年史}.
大村友之丞,{朝鮮貴族列傳}, 1910.
細井肇,{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 1910.
■ 오연숙
■참고문헌
{皇城新聞}
{大韓每日申報}
黃 玹, {梅泉野錄}
鄭 喬, {大韓季年史}
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
■ 참고문헌
內田良平 編, {日韓倂合始末}, 1944.
野田眞弘, {賣國奴}, 講談社, サ-ビスセオンタ-, 1977.
川上善兵衛, {武田範之傳}, 日本經濟評論社, 1987.
■ 김경택(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
■ 참고문헌
牧山耕將, {韓國紳士名鑑}, 1911.
田中正則, {朝鮮紳士寶鑑}, 1913.
李寅燮, {元韓國一進會歷史}, 文明社, 1911.
岩井敬太郞, {顧問警察小誌}, 1910, 韓國內部警務局.
■ 조항래(숙명여대 교수·한국사, 한국사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회장)
■참고문헌
李寅燮, {元韓國一進會歷史} 4冊(文明社, 1911.
武田範之, {李鳳庵事歷} 上, 洪田+壽遺績目錄 81.
宋秉畯, {海山李容九墓誌銘}.
武田範之 編, {侍天敎繹史}.
內田良平, {海山李容九先生誅詞}.
黑龍會 編, {李鳳庵先生事略}
大東國男, {李容九の生涯}, 時事通信社, 1961.
西尾陽太郞, {李容九小傳}, 偉(사람인변생략)書房, 福岡, 1978.
橋本健午, {父は祖國と賣つたか}, 日本經濟評論社, 1982.
■ 김경택(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
■ 참고문헌
大垣丈夫, {朝鮮紳士大同譜}, 1923.
田中正則, {朝鮮紳士寶鑑}, 1913.
李寅燮, {元韓國一進會歷史}, 문명사, 1911.
尹甲炳, [尹甲炳意見], {齊藤實文書} 15권, 고려서림, 1990
■ 윤해동(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강사·한국사)
■ 참고문헌
조선총독부, {조선공로자명단}, 1935.
황현, {매천야록}.
[朝鮮人産業大會 創立經過], {동아일보}, 1921. 8. 1.
市川正明 編, [宋鎭禹警察審問調書], {三一獨立運動} 3, 原書房, 1983.
■ 배항섭(고려대 강사·한국사)
■참고문헌 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 가격3,000
  • 페이지수37페이지
  • 등록일2005.11.08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886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