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전개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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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 장 대공황의 전개

제 2 장 뉴딜과 공황기의 미국인

결 론

본문내용

, 민간투자 증가로 이어졌다.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빚으로 꾸려지는 정부’라며 나치 히틀러 정부를 조롱했지만, 이 같은 조치를 통해 확실히 독일의 경제는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군비 증강으로 대 공황을 극복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이후 추축국 연합을 결성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케인즈 경제학이 무조건 자본주의 세계의 수호천사가 되어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미국이 뉴딜을 통해 경제공황 사태를 어느 정도 해소했지만, 대공황의 완벽한 해결은 2차 대전을 통한 재무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 수 없다.
3. 고난기의 미국 사회
1)공황기의 미국 문화
1920년대에 보급된 라디오는 1930년 들어오면서 거의 모든 집마다 한대정도는 갖추게 된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라디오는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듣기도 했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함께 청취하는 지역 공동체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체로 이시기 라디오는 후버 시기의 정치적인 도발이나 공황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내용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일 라디오 연속극은 실직하여 가정에 남겨진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경제는 암울했지만, 유성 컬러영화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사회적 메시지를 작품세계에 담은 감독 프랑크 카프라의 작품이 각광을 받았으며, 회피주의적인 경향이 짙은 상업영화도 성행했다. 월트 디즈니의 영화가 등장한 시기 또한 이때인데, 그의 만화영화는 완벽한 상업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으며, 백인 기독교 위주의 철저한 주류문화임을 과시했다. 그의 영화에서 흑인, 빈민층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암울한 사회에 대한 풍자는 인쇄 매체를 통해 더 잘 제시되었다. 문학작품들은 논쟁적이거나 사회에 도전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다. 공황기라는 혼란을 통해 기존의 완고한 미국 사회구조를 뒤엎어보자는 구호를 외치는 작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2)공황기의 대중 : 삶과 사상, 민권운동
1920년대의 번영을 경험한 미국인들은 ‘노력하면 할 수 있다’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공황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성공윤리는 파괴되지 않았다. 소아마비 장애인인 루스벨트가 국민들에게 선사하는 자신감은 공황이 주는 좌절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노동자들의 일부는 공황에 분노하여 경제체제를 공격했지만, 그런 움직임은 약했고, 다수의 미국 노동자들은 부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정치계에서의 좌파운동을 약화시켰다. 20세기 초반 사회당을 약진시킨 유진데브스의 뒤를 이은 노먼 토마스는 1928년 대선에서 1백만표-1%가량의 득표율-도 안되는 득표를 하며 미국 내의 사회당의 영향력이 약해졌음을 보여주었고, 같은 대선에서 공산당은 아예 독자 후보조차 내지 못하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따라서 1930년대의 미국 내 좌파운동은 사상적,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국제적인 파시즘을 척결하자는 성격이 더 강했다. 이들은 1930년대 중반의 스페인 내전에 자원입대하여 프랑코 군부세력과 맞서, 그들의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와그너법안에 의해 노동운동의 합법성이 확보되었음에도, 철강과 자동차 산업을 위주로 공공연히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시도가 행해졌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1936년 12월 30일의 미시건주 플린트에서 대규모 연좌시위가 일어났다, 플린트의 제네럴 모터스 공장의 노조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은 준법투쟁을 펼쳤고, 투쟁은 다음해 2월까지 전국 제네럴 모터스 공장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질린 회사측은 협상에 응하여, 자동차노조를 인정하고 파업 노동자들을 사면하는 등 큰 폭의 양보를 했다. 이를 계기로 노동조합은 정치계에서 무시못할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이들은 향후 지속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노동 운동이 공황기-뉴딜 시기에 큰 성과를 거둔 반면, 인종 문제의 해결은 지지부진했다. 민주당 행정부는 남부의 당원들의 지지를 포기할 의향이 없었고, 루스벨트는 남부 흑인들의 투표를 막고 린치를 가하는 행위를 공공연히 묵인했다. 민간자원보존단은 격리된 흑인캠프를 만들어 흑인들을 좌절시켰다. 다만, 성과가 없지는 않았으니, 당대 인류학자들의 노력으로 소멸되어가던 인디언들의 보호구역이 지정되었고,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의 세심한 배려로 행정부 내의 2급 수준의 직위에까지 흑인들이 진출하는 길이 열렸으며, 흑인들의 루스벨트 행정부에 대한 지지는 매우 높았다고 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 등장한 시기가 루스벨트 시기이다. 뉴딜 행정부는 여성 권익의 보호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주요 직책에 여성들을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다만, 경제 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산업전선에서 여성이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여성들은 다시금 가정의 주부로 돌아가야 했고, 워렌 하딩 시기 최초로 주어진 투표권이 유효했기에, 여성운동에 큰 모토가 될만한 소재가 없어, 이시기의 여성운동은 기본적으로 매우 미미했다. 오히려 전통적인 가치관이 두드러진 시대정신에 맞게 여성들도 자신들의 성 역할을 스스로 고정시키는 태도를 견지했다.
결 론
1920년대, 화려한 번영을 구가했다. 20세기 초의 혁신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가운데, 경제 질서의 헤게모니가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겨왔고, 1차대전 이후의 호황은 미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여 모든 미국인들이 꿈에 부푼 채 하루하루 꿈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미국 사회는 시장 내부의 투기와 폐쇄적인 경제 정책 등 복합적인 악재가 작용하면서 사상 유래 없는 공황의 충격에 직면했다. 재산을 처분하여 사둔 주식은 졸지의 휴지조각이 되었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으며, 추락한 경제 지표는 회복될 기미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낙관주의에 기초한 미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은 대공황의 태풍 속에서 미국을 구했다. 루스벨트는 ‘뉴딜’을 통해 좌절감에 잠시 빠져있던 미국인들을 고취시켰다. 193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미국은 불완전 하긴 하지만 공황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탈출했고, 이후 닥쳐올 세계대전 앞에서 온 국가가 하나로 뭉치게 되는 정신적 단결을 이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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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5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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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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