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대표작품들과 그의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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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태원의 대표작품들과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박태원의 생애
1. 생애
2. 구인회(九人會)
3. 친일행각과 월북

2. 박태원의 문학 세계
1. 내면의식의 탐구
2. 산책(散策)의 미학
3. 고현학(考現學)과 세태의 관조(觀照)
4. 민중의 역사와 진실

3. 결론

본문내용

것을 깨닫기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순이가 그토록 불만스럽게 생각한 영이의 직업을 그녀도 결국 가지게 되는 것은 집안의 가난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가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성탄제”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성탄절 무렵의 가난한 집 자매의 아이러니컬한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외면이 아니라, 여인 둘이 서로를 향해 갖고 있는 내면 풍경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4. 민중의 역사와 진실
박태원에게 있어 우리는 모더니스트의 인상을 짙게 갖고 있지만,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그는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 동시대의 프로문학 평가로부터 “좌경하려다 역전한 모던 뽀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달갑지 않은 평을 듣기는 했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경향 문학도 결코 외면하지는 않았다.
「사흘 굶은 봄달」(1933) 이나 「딱한 사람들」(1934) 등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 아픔과 설움을 다룬 작품이지만 「염천(炎天)」(1938), 그리고 행방 후의 「춘보(春甫)」도 같은 경향을 띠고 있는 작품이다. 이것은 뒤에 그가 『대명산천은 밝아오느냐』,『갑오농민전쟁』등의 역사소설을 쓰게 되는 의도와 그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다.
**「춘보(春甫)」(≪신문학≫3호, 1946.8)
시대적 배경은 국태공 대원군이 경복궁 중창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던 시절, 춘보는 가난한 지게꾼으로 끼니를 잇기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가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찬밥 한덩이를 얻어와 온 식구의 허기를 면하기도 하고 허기진 배를 안고 소금짐을 지고 가다가 대관의 행차에 밀려서 곤두박질을 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심하게 다쳐서 며칠간 일도 못나간다. 임신한 아내가 모시조개국을 먹고 싶어하나 그것 한 번 사서 끓여 주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대권 담밑 집이라고 해서 헐린다는 말도 있다. “불쌍한 여편네”, “가엾은 자식들” 이라고 한탄도 한다. 서술자는 춘보의 처지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은 단념하는 것에 익숙하다. 죽도록 일을 하고 또 하여도 밤낮 굶주리고 헐벗으며 그래도 춘보는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렸다. 양반들에게 돈 가졌다는 무리들에게 갖은 압제 갖은 수모를 다 받으면서도 그도 모두 내 팔자소관이려니 한다. 춘보의 생각은 옳았다. 모두 다 제가 타고 난 팔자다. 누가 쌍놈으로 태어나랬더냐? 원망을 하려거든 쌍놈의 집안 어렵고 천한 집안으로 점지를 하여 준 삼신한머니에게나 대고 하여라.
물론 서민의 처제를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반어적 항의라고 할 수 있다. 순한 맹서방이 “술먹고 입 한 번 잘못 놀린 탓”으로 포도청에 잡혀 갔다는 말도 듣는다. 춘보 자신도 그 이야기를 듣고 포도청에 잡혀 들어가 곤욕을 치르는 꿈을 꾼다. 춘보라는 하층 서민을 통해 봉건군주 체제 아래서 지배층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탄압받고 있는 민중의 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박태원은 해방 후 역사적 애국적 전기물을 「춘보」이외에도 발표하였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일제말에 썼던 친일 문학작품에 대하여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조선독립순국열사전』(유문각1946), 『약산과 의열단』(백양당,1947), 「임진왜란」(≪서울신문≫, 1949.1.4~12.14)등을 발표하였다.
『조선독립순국열사전』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열전 형식으로 된 역사이야기다. 제일한일협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을사보호조약, 신협약,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게 된 경위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쳐 싸운 애국지사, 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을 기술한 것이다.
『약산과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의 약전과 의열단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박태원은 이 작품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안창호의 준비론이나 이승만, 김규식 등의 외교노선을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무장투쟁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김원봉의 무장투쟁노선을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를 쓰게 된 계기는 당시 그가 중앙집행위원으로 있던 <문학가동맹>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산당이 불법화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민족진영의 영도자인 이승만이나 김구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약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황약상을 부각시키고 그의 권위를 높이려는 좌익측 정치노선에 따르기 위해서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다.
해방 후 박태원은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문학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군상(群像)」(≪조선일보≫ 1949.6.15~1950.2.2),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문예출판사,1965), 『갑오농민전쟁』(문예출판사, 1부 1947, 2부 1980, 3부 1986)을 발표하였다. 이 세 소설은 비슷한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민중의 시각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할 수 있다. 또 그 작품들 모두가 연계되어 있고, 박태원이 원래 계획하였던 장편의 일부로 집필하였다는 점에서도 같다. 어쨌든 「군상」으로 발단된 역사소설이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로 발전되었고, 23부는 비록 그 자신이 집필하지 못했지만 『갑오농민전쟁』으로 완결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Ⅳ. 결론
이상에서 박태원의 생애 문단활동, 그리고 그의 문학세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실 박태원이라는 한 사람을 몇 장의 종이에 정리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의 아주 일부분만을 바라보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모든 면을 살펴볼 수도 또 알 수도 없었지만, 그러나 모더니스트로서의 그, 그리고 리얼리스트로서의 그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한 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우리 문학사에서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던 박태원이라는 이 존재를 연구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 때 우리의 절반 밖에 기술 할 수 없었던 한국 문학사에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제는 북에 갔다고 해서 연구할 수 없는 작가는 없는 것 같다. 해방 전 문학 활동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연구를 보류해야 할 작가는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박태원을 서스럼 없이 공부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마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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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05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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