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연구 - 구인회와 창작기법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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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시대사적 이태준
2.1. 구인회
2.1.1. 구인회의 활동
2.1.2. 구인회의 성격
2.1.3. 구인회가 대두될 수 있었던 이유
2.1.4 구인회가 작가에 끼친 영향
2.2. 시대적 이태준의 문학 성향

3. 이태준 문장의 기교와 구성법
3.1. 개성적 인물 창조
3.1.1. 여성상의 창조
3.1.2. 노인성격의 형상화
3.1.3. 순박한 인물의 창조
3.2. 치밀한 묘사의 문장력
3.2.1. 묘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장
3.2.2. 간결하고 명료한 대화
3.2.3. 생략법의 사용
3.3. 기법과 구성법의 활용
3.3.1. 상황의 아이러니
3.3.2. 말의 아이러니

4. 맺음말

5. 참고문헌

6. 별첨자료 - 이태준의 연보

본문내용

낳은 셋째 아들의 이름은 ‘녹성’(成)이다. ‘이눔은 글을 잘해서 국녹을 좀 먹게 됐으면 좋겠다’는 ‘손거부’의 희망에 따라 화자가 지어준 것이다. 아버지는 물론 아들 삼형제 모두 이름의 뜻과는 거리가 먼, 가난하고 어리숙한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와 같이 작품 속의 인물들의 이름을 그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는 정반대인 뜻을 나타내는 글자로 명명함으로써 그들의 순진하면서도 건강한 삶의 모습을 희화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바로 대표적인 언어의 아이러니 기법중의 하나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태준의 단편소설 중에서 아이러니 기법으로 짜여 진 작품은 총 30편 정도가 된다. 이는 그의 단편 전체의 반이 넘는 숫자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이태준이 아이러니 기법을 의식하고 이를 창작과정의 하나로 이용했는가 하는 여부를 그의 평론이나 기타 잡문을 통해 검증해낼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아이러니 기법이 이태준 단편소설의 중요한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4. 끝내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이태준이 작품 활동을 하던 1930년대의 시대 상황과 함께, 그가 주도적으로 활동을 했던 구인회라는 단체와, 이태준이 주장한 문장 구성적인 요소를 들어 그의 작품을 탐구해 보았다. 이태준은 우리 문단에 있어서 표현적인 기법의 중요성을 주장한 작가로, 그의 작품이 가지는 복합적인 성향에 의해 현대 단편 소설의 모습을 잡았다고 일컬어 질 만큼 대단한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이태준 이전의 문학사는 시대적으로 복합적인 요소가 뒤 엉켜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라는 측면을 등한시 하고, 문학이 불러일으키는 정치적인 요소만을 중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상황에서 문학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학에 대한 본질적인 표현의 탐구를 주장함으로서 이태준은 현 시대의 우리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마련한 인물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상허 이태준. 그는 우리 문학사에 분기점을 마련한 작가로서 우리의 문학사에서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될 작가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5. 참고문헌
김민정.「한국 모더니즘의 재조명-구인회를 둘러 싼 몇 가지 문제제기」민족문학사학회. 2000
강진호.「구인회의 문학적 의미와 성격-이태준과 박태원을 중심으로」『상허학보 제2집』1995.5
문상득 역.「아이러니」, 서울대출판부, 1980
박현호.「구인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상허학보 제3집』1996.9
서준섭,『한국모더니즘 문학의 연구』 일지사. 1988.
유철상.「구인회의 성격과 순수문학의 의의」 현대문학이론학회 2005
이명희.『상허 이태준 문학세계』, 국학자료원, 1994
이선미.「구인회의 소설가들과 모더니즘 문제 이태준과 박태원을 기준으로」『상허학보 제3집』 1996.9
이중재.「이태준 단편소설에 나타난 아이러니 기법 고찰」.『한국어문학연구학회 동악어문논집 제30집』
이현식.「1930년대 이태준 소설의 특성연구」『상허학보 제18집 』2006.10
허만욱.「이태준 소설의 창작기법과 미학성 고찰」.『동남어문논집 제12집』2001.6.
6. 별첨자료 - 이태준의 연보
1904 -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덕원감리서 주사 출신인 부친 이창하와 모친 순흥 아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남.
1909 - 개화파였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 그 해 8월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국 중 함북 배기미(梨津)에 정착.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수학.
1912 -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할머니를 따라 철원 용담으로 귀향. 친척집을 전전함.
1915 - 안협의 오촌 집에 입양.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오촌 이용하(李龍夏)의 집에 기거함. 사립봉명학교에 입학.
1918 - 3월에 사립봉명학교 졸업. 철원읍내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나 한 달 후 가출. 여러 곳을 방황하다 원산에 객주 집 사환으로 정착. 외조모가 찾아와 보살핌. 이때 문학 서적 탐독. 이후 중국 안동현까지 인척 아저씨를 찾아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 하고 경성(서울)까지 옴.
1920 - 4월 배재학당 보결생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나 등록하지 못함. 낮에는 상점 점원으로 일하며 밤에는 야학에 나가 공부함.
1921 -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고학생으로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받음.
1924 -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예부장으로 활동. 『휘문』 제2호에 동화「물고기 이약이」 등 6편을 발표. 6월 동맹휴교 주모자로 4학년 1학기에 퇴학. 김연만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1925 - 일본에서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 (이 작품은『시대일보』에 7월 13일 발표됨), 문단에 나옴.
1926 - 4월 동경 상지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 신문, 우유배달 등을 하며 매우 궁핍한 생활 속에 나도향 등과 교우.
1927 - 11월 상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함. 각 신문사와 모교를 방문일자리를 구하나 취업난에 허덕임.
1929 - 『개벽』입사.『학생』,『신생』 등의 편집에 관여함. 이때 소년 물 다수 발표.
1930 -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의 이순옥(李順玉)과 결혼.
1931 -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 신문의 폐간으로 『조선중앙일보』학예부 기자가 됨.
1932 - 梨專, 梨保, 京保 등의 학교에 출강함.
1933 - 박태원, 이효석 등과 ‘구인회(九人會)’를 조직. 경성부 성북정 248번지로 이사. 이후 월북 전까지 이곳에 거주.
1935 -『조선중앙일보』를 퇴사, 창작에 몰두함.
1939 -『문장』의 편집자 겸 소설추천심사위원으로 활동. 친일적인 글에 손을 댐.
1943 - 강원도 철원 안협으로 낙향. 광복 전까지 이곳에서 칩거함.
1946 - 7월-8월 경 월북.「해방전후」로 제1회 해방문학상 수상. 10 월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 여행.
1947 - 5월 소련 여행기인 『소련기행』이 남쪽에서 출간됨.
*월북 후 당시 김정일대학 교수인 정율에게 “조선의 모파상”이라 기림 받고, 연구 발표회를 갖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지만 , 1956년 한설야에 의해 사상적으로 비판받으면서 숙청된 후 생사 미확인.(강성호의 증언에 의하면,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한 것으로 되어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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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0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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