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방송학]우리의 스크린 쿼터제와 그 논란에 대한 이해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신문방송학]우리의 스크린 쿼터제와 그 논란에 대한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스크린쿼터제[Screen Quota]란?

2. 스크린쿼터제의 기원

3. 극장주들의 불만과 한미투자협정이라는 복병

4. 99년 '6월 대투쟁'과 정부의 대안

5. 이창동의 축소 검토 발언과 공정위의 인식

6. 축소 불가피론, '마이너리티 쿼터'론, 재산권 침해론

7. “사고가 줄었으니 다시 신호등을 없애도 되겠습니까?”

8. 문화 다양성 협약

9. 투자협정(BIT: Bilateral Investment Treaty)

10. 스크린 쿼터의 의미와 법적 근거

11. 스크린 쿼터의 유래와 역사

12. 외국의 사례

13. 우리나라의 스크린 쿼터 시행 변천

14. 종래의 문제점

15. 현재의 스크린 쿼터 논란의 배경과 견해

기고문 - <스크린쿼터 찬반론>

본문내용

할리우드가 되고 싶어 하는 형국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할리우드영화가 99%를 점유하고 있는 미국에 내가 살고 있다면, 내 국적과 같은 영화들이 자국의 영화 시장을 완전히 점유하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기는커녕, 그 땅에서 통용되는 영화 문화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존엄성을 가진 개인으로서는 그 상황이 폭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폭압의 느낌은 99%라는 비상식적인 수치보다 그 99%를 구성하는 내용에서 나온다. 몇 가지 공식으로 대중의 입맛을 단순화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영화를 철저하게 산업화한 할리우드의 규범과 질서가 그 내용물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영화 시장에서 자국 영화 점유율이 40%가 되었든 60%가 되었든 그 계량적 수치가 그 컨텐츠의 내용적 실체, 그 질적 풍부함이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견인해내지 못하거나 혹은 담보해내지 못할 경우, 그 수치는 정당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 허수에 불과하다.
이 문제가 정말로 스크린쿼터와 전적으로 무관한, 배급 방식만의 문제일까? 경제 관료라면 몰라도 극장은 더 이상 스크린쿼터 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년에 블록버스터급 한국영화 두 개 정도만 터져주면 쿼터 규정 일수 정도는 가뿐하게 채울 수 있다. 극장들은 조금 관객이 든다 싶은 영화의 경우, 끝물에 관객 수가 줄어들더라도 스크린쿼터를 고려해 장사 안 될 한국영화를 거느니, 기존 개봉작에 남은 일수를 배정한다. 허울 좋은 문화 논리를 명분으로 내건 스크린쿼터라는 제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을 독식하고도 남을 영화들에게 마지막 순간에조차 남아 있는 시장의 틈새까지 헌납해왔다. 애초에 충무로 영화인들이 생각하는 '문화'라는 것은 시장 논리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서 사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제대로 해명되고 극복되지 않는 한 스크린쿼터는 한국의 영화 '문화'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한국영화 '산업'을 위한 제도라고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시내 극장을 샅샅이 뒤져도 한 달 동안 시간 내서 볼 만한 영화 하나 찾아내기 힘든 도시에 살고 있다. 이 문제를 나는 김영진처럼 소수 열성 영화팬들의 입장에 한정된 문제로 치부해서 말할 수 없다. 인간에게 문화란 어떤 것이고, 문화로서 예술로서 영화는 어떤 것인지,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것이 충무로 영화판에서 가능한가? 이런 질문에 피식 웃음을 터뜨릴 이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그것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고 소수 엘리트들의 고급 문화이기만 한 것인지, 인류 역사가 쌓아놓은 정신사적 기록으로서의(영화)문화는 이제 와 세상살이에 하나 쓸모 없는 종이 쪼가리가 돼버린 것인지. 지금 세태는 관객들이 그런 근원적인 질문을 품어볼 수조차 없도록 그들의 경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대다수 관객들에게 영화는 TV 드라마나 시트콤의 잘 빠진 버전일 뿐이다. 영화를 그렇게밖에 정의 내리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관객의 무능함 탓일까. 풍부하고 좋은 문화에 자유롭게 접근 가능한 사회가 도래한다고 해도 더 많은 다수가, 보는 순간 실컷 웃거나 울더라도 극장을 나서는 순간 바로 잊을 수 있는 영화가 좋다고 말할 것이고, 소수만이 소위 예술영화를 즐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취향을 판단한 것이지 강요당한 건 아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라면 당연히 경제성, 혹은 효율성이라는 논리로 '소수' 문화를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붙이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러하다. 현실의 이러한 문제는 먹고살기 힘들도록 옥죄어오는 갖가지 국내외 경제 문제들이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이라크 침공이나, 한국군 파병과 같은 문제와 별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군의 더러운 무력에 희생당한 이라크인들의 처지가 가까운 미래에 전 인류의 운명이 되고 말 것 같은 생각에 자다가도 몸서리쳐진다. 우리가 문제라고 느끼는 것들에 일일이 개별적인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는 논리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와 그것이 새끼를 친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 등이 세상의 모든 대소사를 움직이며 개인들의 뼛속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삶을 쥐고 흔들고 있다는 것은 감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영화가 존재하도록, 그리고 시네마테크가 존재하도록 애쓰는 것이 내게는 단순히 영화, 그것도 마이너리티 영화의 영역에 국한된 운동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이라는 어느 한 곳에 한정되지 않을 포괄적인 영역에서 벌이는 자본주의라는 거대 공룡과의 싸움이다. 그 자체로 논리 구조를 가지는 독자적인 문제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거대한 공룡에 대항해 전방위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으며 스크린쿼터라는 제도도 그 싸움의 한 방편으로 보아야 한다. 스크린쿼터 대책위는 한미투자협정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미국 의도를 읽어내어 스크린쿼터의 명분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그것이 결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점검하고 애초에 운동을 시작했던 이유를 매순간 되짚어보며 자기 동력을 찾았어야 한다. 그 명분들이 살아 있는 명분이 되기를 바랐다면 스스로 존재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확인하는 것을 힘으로 자신부터 추동했어야 한다. 그것이 운동을 하는 기본 윤리이다.
스크린쿼터 안에 마이너리티 쿼터를 배정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접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기대도 솔직히 크지 않다. 스크린쿼터를 지키겠다고 앞장선 영화인들이 '정말 양질의 영화 문화를 좋아하기나 하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이너리티 쿼터가 현실화되고 그런 정책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책이 일정한 성취를 거두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를 만들고 끌어가는 사람들의 인식과 마인드이며 그것을 가능케 할 의지와 열정일 것이다. 오기민의 글에서처럼 스크린쿼터가 표방하는 문화 다양성이 할리우드영화에 대항하는 자국 (상업)영화 보호라는 의미뿐이라면, 마이너리티 쿼터는 더더욱 쓸데없는 잡음이 끓는 것을 막기 위해 마지못해 내놓은 자구책으로밖에 보일 수 없지 않겠는가.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6.02.18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543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