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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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한국 고대사의 범위와 그 특질에 대하여
1.한국고대사의 범위
2. 고대사의 정의
3.한국고대사의 특질

2. 삼국사기를 통해본 한국 고대사
1.정치기사를 통해 본 삼국상
2.천재지변기사를 통해 본 삼국상
3.외교기사를 통해 본 삼국상
4.전쟁기사를 통해 본 삼국상

3. 한국고대사에 있어서 왕의 지위와 권한
1.삼국시대 왕의 성격
2.삼국시대 왕의 직능
3.삼국시대 순행의 정치적 의미
4.순행을 통하여 본 왕의 활동

본문내용

정치적 취약지구를 순행함으로써 풍속과 제도를 통일시키고 연장자와 덕망자를 찾아 인정의 구체적 실행을 행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인재등용과 대사면을 위한 순행은 왕도정치구현의 수단이다. 사면의 경우 순행의 부수적은 은전 은전(恩典) : 온정 있는 조처(措處). 특별한 배려.
으로, 원래 사면은 중앙정부에서 천재지변의 정신적 원조와 순행시 거의 사면의 특전을 주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순행에는 국학과 사찰방문을 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말 정치적 혼란 속에서 추진된 유교정치의 구현과 호국에의 정신적 목적을 가진 특수한 순행이 것이다. 그래서 왕실의 보호와 재건을 꾀하려는 의사의 표시이며, 정신적 위로행차인 것이다. 그리고 왕의 사찰방문은 경제적·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는 사찰세력의 견제나 협조를 위한 수단이다.
고구려의 순행 특징은 빈번한 수렵을 하였다는 것이다. 백제 역시 60%가 수렵을 통한 순행으로 두 나라간의 역사적 연계성과 문화·혈통상의 유사성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빈번한 수렵이 대개 1~2C에 집중된 것으로 보아, 북방민족과의 대결과 영토 확장에 따르는 군사적 의미와 정치적 입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수렵은 광범한 군사훈련의 뜻을 지난 사격연습이며, 국가 전체를 하나의 테두리로 묶으며 국민의 체력향상운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정복지에 대한 통치권의 확인이자 백성들의 의견청취와 인물발탁의 방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순행의 특징으로 왕이 반드시 졸본에서 시조묘 제사를 거행하고, 그 시기가 거의 즉위 초나 전승 직후였다. 그래서 이러한 의식은 부단한 외침 속에서 유지한 종묘사직에 대한 투철한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순행 중에 인물발탁의 의미가 비교적 컸다는 것은 지방세력의 억압과 그 형세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인물발탁을 위한 출장이 1~2C에 집중되었기에 군소국가의 중앙흡수책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수렵이나 사건모의가 거의 국초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건국 초 정치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 같은 경우는 고구려와 같이 순행의 66%가 수렵행이였다. 백제 역시 단순한 수렵이 아니었다. 그 수렵지가 초기는 한산일대, 4C에는 구원과 서해도 6C에는 사비일대에서 수렵을 하였는데, 국초의 한산은 수도의 외곽으로서 왕의 민정사찰을 뜻하며, 4C의 서해도 일대에서의 수렵은 미추홀 해씨와의 연결을 꾀하려 하였다. 그리고 특히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한 전술적인 요충지에 대한 배려로 한강하류의 중요성을 반영한다. 그리고 6C의 동성왕에 의한 사비원 출렵은 새로운 수도의 물색과 지세파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순행은 민심수렴의 목적을 띤 왕의 지방출장이라는 문헌상의 뜻보다 다양하고 다른 의미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국의 출행시기가 1~3C, 8~9C에 집중되었고, 봄철에 빈번히 나타난 것으로 보아 순행은 왕권의 불안정과 사회 혼란기에 집중되는 정치적 출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시대 왕은 중국 황제와는 다른 본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출행동기 역시 삼국은 각각 다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정치적 동기가 50% 이상으로 1~2월에 집중된 것은 관리임면·대사·제사·하교·책봉 등 정치적 이유로 연초에 정치에 대한 확신과 의견청취를 위해 순행을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즉위와 동시에 왕이 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졸본에서 시조묘 제사를 거행하는 것도 그 시기가 즉위 초나 전승 직후였다는 사실과 함께 인물발탁을 위한 출장이 빈번했음을 나타나게 된다. 백제 같은 경우, 천재지변과 순행이 큰 관계를 맺고 있는데, 정치적 이유로는 축성(독려·기념)과 관계된 것으로 백제사회의 성격과 취약성을 말해준다. 그래서 전승과 출행이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이상에서 삼국시대의 왕은 외형적인 특징, 성격, 직능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일찍부터 3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인정하며 왕은 절대적인 통치자로서 여러 가지 임무를 부여받았다. 즉, 왕은 선천적으로 일반인과는 다른 골산과 신체적 특징과 천부적인 덕성과 기능을 가졌다. 제·려의 왕도 이와 같이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왕은 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어 3국사회상의 차이를 반영한다.
3국의 왕은 우선 사회질서를 견고케 하는 종묘에 제서를 주관하는 동시에 풍요와 기원을 위한 주술적 행위를 갖고 있었다. 최고의 군사정치권자로서 병권을 장악하여 정복전쟁을 수행하며 국가를 보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관리의 임명을 통해 중앙집권을 강화시키는 한편, 법령의 반포, 권능 등 임적 자원의 확보와 대내결속을 공고히 하면서 권위를 확장시켰다. 나아가서 외교와 합법적인 권한을 갖는 동시에 필요시에 순행을 통해 행정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제도적으로 견제와 제약을 받았다.
따라서 왕은 국가를 상징하였고, 고대국가에 있어서 왕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때문에 왕은 일반 백성과는 본원적으로 달라, 그 교체는 ‘하늘의 뜻’이 되기 마련이어서 몇가지 두드러진 천재와 천변과 관련을 갖게 된다. 신형식, 앞의 책. p108
왕의 직능으로서 순행은 일반적으로 민심수량의 목적을 띤 왕의 지방출장이라는 문헌상의 뜻보다 다른 의미가 더 컸다. 출행시기가 제·려는 1~3세기, 신라는 8~9세기에 집중되고 봄철에 빈번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순행은 왕권의 불안정, 사회혼란기에 집중되는 정치적 출장이라는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삼국시대 왕이 중국의 천군과는 다른 본질적인 성격이 있으며, 고대국가의 특징이 엿보인다. 신형식, 앞의 책. p109
3국의 순행은 중국과 다른 그 시대의 필요성에서 정치적·군사적 목적을 띠고 계승되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다른 빈도의 차이는 정치적 안정과 왕권의 강화(약화)와 순행의 수치가 관련되며, 3국의 직접적인 출행동기에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순행은 왕권의 강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천재지변과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순행의 내면적인 목적과 필요성을 의미할 수 있다. 신형식, 앞의 책.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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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4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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