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항일투쟁과 제1차 국공합작 그리고 국민정부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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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항일투쟁과 제1차 국공합작 그리고 국민정부의 수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제1차 국공합작의 형성과정
2) 제1차 국공합작의 정치체계
3) 국민정부의 수립
4) 북벌과 중국의 통일

3. 마치며

본문내용

결의안을 결의하였다. 이후 중앙정치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를 성립시켜 4월 18일부터 정식으로 남경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두개의 국민정부가 수립하게 되었고 이 둘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영한분열이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대립은 군사적인 행동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7월에 장개석의 군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철도교차지인 여주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서 군벌세력에게 참패를 당하였고 이것이 무한정부의 지속적인 개인적 적대감과 자신의 탈진과 맞물려 8월에 자신의 지위를 사임하였다.
) 조너선 D. 스펜스, p. 421.
7) 두 국민정부와 북벌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 281.
무한 국민정부의 보로딘은 하남으로 남하하는 봉군과 맞서서 정치·군사적으로 정세를 바꿔 고립된 형세를 벗어나려 하남으로 북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양호지방에서 토지혁명을 진행하면서 강서, 광동, 광서에서의 무한정부세력을 회복시키면서 북벌하여 풍옥상과 만나기로 하였다. 북벌군은 4월 19일에 북벌을 진행하여 하남으로 들어갔다. 그는 풍옥상에게 대대적인 양보를 하여 풍옥상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지만 풍옥상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장개석과 당생지와 함께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풍옥상의 주장은 남경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이때 남경정부는 서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에 풍옥상과 남경정부는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8) 무한정부의 청당과 영한합작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 283.
왕정위는 무한으로 돌아왔는데 국민당 좌파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그가 없던 기간동안에 진행되어온 노농운동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장개석이 4.12반공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왕정위와 여러 번 만나 회담을 하여 청당에 대해서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공산당과 일치된 것으로 개조 이후 국민당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왕정위는 반공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와 전후하여 무한 내부의 군인들 역시 반공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왕정위는 좌파위원들을 소집하여 공산당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여 이들을 제제하자는 의견이 나와 이를 실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각각 정부의 핵심인물들이 서로 양보를 하였고 실직에서 물러나서 다시 화해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영한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9) 장·왕 합작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 285.
왕정위는 하야하고 무한으로 돌아와 당생지와 특별위원회 무한분회를 설립하고 남경과 대립하였다. 1927년 6월 23일 무한의 당생지와 남경의 계계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 무렵 국민군은 산둥성을 향해 진격 중이었다. 이에 당황한 국민군은 수도 남경의 방위를 위하여 남하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7월 24일 서주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무한정부 역시 내부적으로 안정이 결여되어 붕괴직전에 있었다. 그래서 당생지는 패하고 스스로 하야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런데 왕정위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광주로 가 다시 그곳에서 광주 국민정부를 성립시켰다.
한편 스탈린은 코민테른 명의로 보로딘과 로이에게 비밀전문을 보냈는데 그것은 국민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내용의 전문이었다. 그걸 로이는 6월 5일에 왕조명에게 이 전문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왕조명은 23일 국민혁명의 지도권은 국민당에게 있다고 하는 선언을 냈다. 그것은 자신의 좌파적 성향을 버리는 것을 뜻하였다. 이를 통해 무한정부는 반공을 내걸었고 공상당은 축출되었다.
) 서문당편집실, p. 36.
이때 왕정위와 계계는 서로 장개석과 연합하려고 하여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에 장개석은 복직이 되었고 정부의 당권, 정권,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0) 북벌의 완성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 287.
조너선 D. 스펜스, p. 424.
이때 장개석이 복직되자 기간 안에 북벌을 끝내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장개석은 남경에 총사령부를 다시 조직하고 북벌을 단행하였다. 1928년 3월 장학림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장개석의 군대는 계속해서 승리를 하였는데 여기서 복병을 만났다. 그것은 일본군이었는데 장학림을 지원하던 일본이 자신의 조계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국민군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장학림에게 베이징을 버리고 만주로 돌아간다면 국민군을 막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음모였다. 장학림을 태운 열차는 6월 4일에 폭발하였고 장학림은 사망하였다. 장학량은 12월 25일 장개석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을 보여 마침내 1928년 중국은 통일을 이루었다.
장개석이 군벌을 누르고 북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벌의 학정에 시달려온 인민의 지지와 함께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직을 맡으면서 길러온 강력한 군사력과 절강재벌로 대표되는 자본가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강재벌은 상해를 본거지로 하는 금융자본가를 말하며 그들의 중심세력은 재계와 정계에서 활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장개석정부의 사상적 기반은 국민혁명 이래 독립과 통일을 추구해온 민족주의 조류이며 이는 남경정부의 성격이기도 했다.
Ⅲ. 마치며
국민당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신해혁명의 완성인 중국에 민족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야욕과 중국공산당이 아직 중국내에서 그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1차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의 통일과 민족정부인 국민당정부를 세운 사건은 앞으로의 중국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중국의 근현대사에 길이 남을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참고문헌>
서문당편집실. <<다큐멘터리 중국현대사2>>. 서울: 서문당, 1986.
신승하. <<중국현대사>>. 서울: 대명출판사, 1992.
________.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서울: 대명출판사, 2001.
신연철 외 3명. <<손문과 국공합작>>.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9.
신채식. <<동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1993.
조너선 D. 스펜스 저, 김희교 역. <<현대중국을 찾아서1>>. 서울: 이산, 1998.
조훈. <<강좌 중국근현대사>>. 서울: 역사교양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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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11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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