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하대 독서삼품과의 설치와 운영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신라하대 독서삼품과의 설치와 운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學 9년이 되어도 二經이상 通하지 못한 자는 퇴학시켰다고 한다. 신라의 국학생의 관위의 상승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의 고시와 비슷한 평가방법이 적용되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위의 책, 138쪽.
맺음말
지금까지 讀書三品科의 설치 배경과 운영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서 맺음말을 대신하려고 한다. 독서삼품과는 元聖王 4년(788)에 처음으로 정해졌다. 독서삼품과가 정해진 배경에는 왕위계승과정의 어려움으로 인한 왕권에 대한 위협에서 왕권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기존의 등용방식과 다르게 선발된 인재들에 대한 필요가 있었다. 또한 독서삼품과를 통해서 유교정치이념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원성왕은 자신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일련의 행위들과 함께 독서삼품과를 실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서삼품과의 설치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라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는 유학의 보급은 독서삼품과를 실시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强首와 같은 유학자를 통해 그 예를 살필 수 있었다.
독서삼품과를 國學과 관련하여 국학의 졸업시험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독서삼품과에는 국학생 뿐만이 아니라 유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이면 모두 그것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앞의 强首의 예에서 보듯이 당시 개인적인 교습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을 살펴볼 때 독서삼품과가 국학의 졸업시험이었다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또한 渡唐留學生 역시 독서삼품과의 적용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도당유학생은 독서삼품과의 적용을 초월하여 있었다. 子玉의 예에서 볼 수 있었듯이 文籍出身이 아닌 子玉은 지방관으로써 파견될 수 있었고, 이것은 당시 도당유학생들은 독서삼품과의 적용 밖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독서삼품과는 신라의 骨品制的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기존의 인재등용 방식에서 일대 전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독서삼품과는 신라의 유학 이해 수준이 한층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神文王代에 설치된 국학의 교수 과목이 수준의 이해에 관계없이 혼재되어 있었던 데 반해, 원성왕대의 독서삼품과에는 上品으로 올라 갈수록 더 높은 이해를 요하는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유학 이해의 정도가 신문왕대 보다 체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
고경석,「신라 관인선발제도의 변화」,『역사와 현실』23, 1997.
盧鏞弼,「古代의 敎育과 人材養成」,『한국사 시민강좌』18, 1996.
李基白,「新羅骨品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1996.
李明植,「新羅 國學의 運營과 再編」,『大邱史學』59, 2000.
정호섭,「新羅의 國學과 學生祿邑」,『史叢』58, 2004.
洪起子,「新羅 下代 讀書三品科」,『新羅의 人材養成과 選拔-新羅文化諸學術發表會論文集-』 19, 1998.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6.05.11
  • 저작시기2005.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898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