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귀족사회의지배체제와경제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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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귀족사회의 지배체제
ⅰ) 중앙의 정치제도
ⅱ) 지방행정조직
ⅲ) 군사조직
ⅳ) 교육․과거제도

Ⅱ. 귀족사회의 경제제도
ⅰ)전시과 체제
ⅱ) 민전의 분포
ⅲ) 고려의 토지소유관계
ⅳ)수취제도와 조운

Ⅲ. 귀족사회의 사회구조
ⅰ) 귀족사회의 성격
ⅱ) 사회신분의 구성
ⅲ) 사회정책과 시설

Ⅳ. 귀족사회의 문화
ⅰ)국가불교의 성격
ⅱ) 천태종의 성립
ⅲ) 유학의 발달
ⅳ) 예술의 발달

Ⅶ. 귀족사회의 대외관계
ⅰ) 고려 대외정책의 특성
ⅱ) 거란에 대한 항쟁
ⅲ) 여진과의 관계
ⅳ) 송과의 관계

본문내용

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별다른 소득없이 철군하였으니, 이는 아직도 항복하지 않은 북계의 서경흥화진 등 제성의 군사력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거란은 약조를 지키지 않는 고려에게 현종의 입조를 독촉하였으나 고려는 왕의 병을 칭하여 회피하였다. 이에 거란은 본래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반환을 강요하였지만 역시 거절당하자 마침내 1018년 소배압으로 하여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상원수 강감찬이 흥화진에서 내침하는 거란군을 맞이하여 크게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군을 귀주에서 다시 섬멸하니 거란의 침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거란은 몇차례의 침략에서 참패만을 당하고 그들의 목적인 강동육주의 반환에는 실패하였다. 이에 1019년에는 거란과 고려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어 평화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전란이 끝나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羅城을 축조하였고, 그 후 덕종 2년부터 국경선에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1044년에 완공하였으니 이것이 천리장성이다.
ⅲ) 여진과의 관계
고려가 많은 인력과 경비를 쓰면서 대규모의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거란 뿐 아니라 여진에 대한 대비에도 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11세기 후엽부터 북만주에 있는 여진 완안부가 점차 강성해져서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원래 여진족은 발해의 일부를 이루던 말갈의 유족으로 문화수준이 낮아 아직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에 대하여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경을 침구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공물을 바치는 여진족에 대하여는 식량철제농구 등을 주어 회유하고, 반면 침구하는 자에 대하여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일반 민호에 편입시켰다. 그런데 여진족에 통일세력이 나타나 오히려 고려에 압박을 가하니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완안부에 의하여 통일된 여진은 1104년 고려에 복속하였던 여진족을 토벌하여 함흥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에 이르렀다. 고려는 임헌과 윤관으로 이들을 치게 하였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여진의 기병을 고려의 보병으로는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려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주축으로 한 별무반을 조직하여 신기군신보군항마군을 편성하고 여진과의 싸움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1107년에 윤관에 의한 여진정벌이 단행되었다. 이 때 윤관은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출발하여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키니 이에 고려의 국경은 크게 북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진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침구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 환부를 애원했으며, 또 고려 조정 안에서도 윤관의 공로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마침내 1109년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의 아구타(阿骨打)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여 금을 건국하고 요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고려에 대하여도 사대의 예를 취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고려는 1126년 권신 이자겸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에 대해 상표 稱臣할 것을 결정하였다. 초기에는 강건한 기개로 거란의 침입에 항전을 다하였던 고려가 이제는 문신귀족들의 정치권력 유지를 위하여 여진족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ⅳ) 송과의 관계
고려는 건국 이후 5대의 여러 중국 왕조와 교빙하였는데 宋이 중국을 통일하자 이와 친선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송의 친선관계는 북방민족인 거란과 여진의 흥기로 방해를 받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강화를 맺게 되자 송과의 교빙은 끊어지지 않을 수 없었고 다만 비공식적인 상인의 내왕만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문종 때에는 거란의 세력이 쇠약해졌으므로 다시 송과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고려는 송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려는 의도가 많았고, 송도 고려를 통하여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양국의 통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친선관계도 12세기 초엽에 여진족이 흥기하여 금을 건국하면서 다시 변모하게 되었다. 송은 금과 손을 잡고 숙적인 요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얼마 안가서 이번에는 오히려 금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송의 국도 경이 함락되고 남은 왕족이 강남으로 피신하여 남송을 세워 명맥을 유지하게 되니 고려와 송사이의 통교는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이 고려와의 친선관계를 도모한 목적은 거란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의 군사력을 빌리려는 데 있었으나, 고려는 중립의 태도를 취하여 이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하였다. 일찍이 송이 거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고려에 원군을 청한 일이 있으나 고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또 송이 금의 침공을 받았을 때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줄 것을 간청하였고, 강남으로 옮긴 후에도 국도가 함락될 때 포로가 된 徽宗欽宗의 구출을 부탁하였으나 역시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고려는 친송정책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군사적 개입을 회피하는 중립의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송의 고려에 대한 외교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있었는 데 반하여 고려의 대송외교는 문화적경제적 목적에 주안점이 있었다.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통하여 그들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즉, 고려는 사신과 학생승려를 송에 파견하여 그들의 발달된 유학불교예술 등을 받아들였으니, 이에 따라 고려의 유학불교가 심화되고 송 판본의 전래로 고려의 인쇄술이 발달하였으며, 송자의 영향으로 고려자기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송의 아악인 大晟樂이 고려에 수입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고려는 공적인 사신과 사적인 상인의 왕래로 송과의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고려는 송의 선진문화를 흠모하였고 또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송에서 서적비단자기약재차향료 등을 수입하였으며, 반대로 금은동인삼나전칠기화문석 등을 수출하였다. 이 때의 碧瀾渡는 송의 상인 뿐 아니라 멀리 대식국(아라비아)의 상인까지도 출입하는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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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15
  • 저작시기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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