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A+레포트)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A+레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부르크하르트는 누구인가?
1. 부르크하르트의 생애에 대한 고찰
2. 19세기 유럽
3. 그가 바라 본 유럽

II.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적 르네상스관 고찰
1.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관
2.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
(1) 고전・고대의 부활
(2) 인간적 개성의 발견
(3) 현세성의 발전
(4) 근대국가의 기원
(5) 중세관
3. 계승과 발전

III. 부르크하르트의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
1. 부르크하르트의 한계
(1) 주제와 내용의 한계, 부르크하르트의 사상과 이념의 한계
(2) 부르크하르트의 예술사학의 한계
(3) 특정영역의 선호가 가져오는 부작용
2.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한계와 비판
(1) 부르크하르트 적 르네상스관의 형성
(2) 부르크하르트 적 르네상스관에 대한 비판
3. 부르크하르트 관의 재 반격

본문내용

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 ‘장기적 중세’ 동안 몇 번에 걸쳐 일어났으며, 그리하여 르네상스가 중세와 대립적인 것이 아닌 중세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자기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관의 뿌리를 찾고 있던 18~19세기의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혹평하였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5세기에 고대문명이 붕괴된 후 기독교회가 고대문명의 일부 편린을 보존함과 동시에, 고위 성직자들과 야만적인 전사 귀족들이 보통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강력한 토대를 약화시킬 수도 있는 모든 지적종교적 부활의 움직임을 억누르면서 암흑과 야만의 1천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상업과 도시생활의 부활-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하지 않았다-속에서 고대문학이 부활하고 세속적이며 심지어는 反 종교적인 가치체계가 정립되는 토대가 닦였다. 새롭고도 뚜렷하게 근대적인 생활철학을 등장시킨 이 가치체계는 세속 생활자와 세속 생활에 대한 유혹을 예찬했다. 이 가치체계는 새로 발전된 고대의 이교적 문학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세속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이 새로운 가치체계는 애초부터 기독교적 신념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르고프는 중세와의 단절로 르네상스를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19세기 적인 편리한 생각이며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시대적 정체성 확립과 필요성에 의해 자의적인 조작이 된 것이라고 보았다.
4) 크리스텔러(P.O. Kristeller)와 한스 바론(Hans Baron)의 비판
나치즘을 피해 미국에 망명한 이들은 고대와 중세 및 근대를 각각 단절된 편린으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문명의 고리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즉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문명의 위기의식을 겪은 이들은 역사의 단절적인 해석과는 달리 연속적인 해석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텔러는 휴머니즘의 수사학을 통하여 르네상스와 중세 및 고대를 연결시키려고 하였으며 르네상스가 다양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따라서 르네상스의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경향을 모두 배격한다. 바론은 플로렌스의 시민적 휴머니즘을 통하여 르네상스를 그 이전의 시대들과 연결시키려 하였다. 시민적 휴머니즘이란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자이자 피렌체 찬가의 저자인 브루니의 견해로서 현실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이 진정한 시민이며 이러한 전통은 Vita Activa (활동적인 삶)로서 고대 로마의 전통이었다. 키케로와 같은 위인들은 공화정 수호라는 현실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이는 시민적 휴머니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5) 사턴(Sarton)의 비판
사턴교수는 과학사의 개척자다. 과학은 근대세계의 핵심적 요소가운데 하나이므로, 르네상스의 근대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어떤 논쟁이건 과학이 수행한 역할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사턴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인들이 과학 분야에 별로 공헌한 바가 없다고 결론지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에 동의한다. 그렇게 보면 르네상스는 결코 근대세계의 출발점이 아니다.(우리가 르네상스 개념에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포함시키지 않는 한 말이다).
6) 퍼거슨(W.K. Ferguson)의 종합
퍼거슨은 사상뿐 아니라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문화사의 접근법을 주장하였다.
7)비판의 한계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르네상스’라는 용어와 개념은 다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주된 이유는 사가들이 어떤 식으로 부르든 부르크하르트가 묘사하였던 역사적 실체를 달리 표현할 적절한 용어를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격에 가담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주된 경향들을 토론하기 보다는 부르크하르트가 사용했던 용어들의 적절성을 부정하는 데 더 주력하였다.
참고적으로 19세기에 르네상스를 논하는데 있어 당사자인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르네상스 사가가 배출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1850년대와 1860년대에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온갖 노력을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라는 단 하나의 문제에 쏟아 부었다. 만약 그들이 되돌아본 과거가 있다면 그것은 통일 로마제국이었다. 정치적 분열기였던 르네상스는 통일 이후에야 주목을 받았다. 사무엘 버너 著 <서양근대사 : 혜안>, 14페이지 참조
3. 부르크하르트 관의 재 반격 야콥 부르크하르트 著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한길사>, 44페이지부터 45페이지까지 참조
부르크하르트는 근대의 뿌리를 추적하기 위해 르네상스의 상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인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다 보니 중세와의 단절적 모습을 보게 되었고, 더 나아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또는 민족주의와 산업적 시민사회로 특정 지어지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이 새로운 시대에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데서 가장 중시한 개념은 바로 ‘연속성’이다. 연속성이란 기본적으로 다양하지만 특징적이었던 서양의 과거 전통을 단절 없이 잇는 역사적 연장과정을 의미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고전 문화의 전통이 로마시대의 친 그리스적 분위기에 편승해 고전 그리스-로마 문화가 탄생하였고, 이 전통이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라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새로운 게르만-기독교적 문화와 결합하면서 중세 유럽이 형성되었으며,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새로운 문화 전통은 다시 고전 문예의 부활을 지향하던 르네상스와 원시 기독교로의 회귀를 꿈꾸던 종교개혁운동과 맞물리면서 근대의 절대주의 시대와 혁명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는 것이 부르크하르트의 이른바 ‘역사적 연속성’ 개념의 기본골자이다.
이 거시적이면서도 지극히 유럽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볼 때,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는 중세와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 그것도 과거의 전통을 이어가고 그 전통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아주 끈끈한 연속체 안에서의 한 계기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비록 부르크하르트 자신이 자세히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르네상스는 결국 근대를 향한 전혀 새로운 ‘단절적 출발’이 아니라 고대에서 출발해 중세를 거쳐 현대를 향해 나아가는 일종의 ‘연속적 기점’이었던 것이다.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6.07.24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974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