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친일파][친일파 의열투쟁]일제시대 친일파의 배경과 활동 및 친일파 의열투쟁 고찰(이완용과 송병준 한일합병, 일본귀족이 된 62명 친일거두, 송병준과 동화정책, 친일파 의열투쟁 의의, 일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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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친일파][친일파 의열투쟁]일제시대 친일파의 배경과 활동 및 친일파 의열투쟁 고찰(이완용과 송병준 한일합병, 일본귀족이 된 62명 친일거두, 송병준과 동화정책, 친일파 의열투쟁 의의, 일제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제의 식민사관과 역사 왜곡

Ⅲ. 일제 시대 친일파의 형성 배경
1. 친일파 양성
2. 초기 종교침략과 친일파
3. 초기 경제 침략과 친일파

Ⅳ. 친일과 변절
1. 직업적 친일분자
2. 집권층의 친일
3. 민족진영의 변절
4. 그 외의 변질

Ⅴ. 이완용과 송병준의 한일합병

Ⅵ. 일본귀족이 된 62명의 친일거두

Ⅶ. 송병준과 동화정책

Ⅷ. 친일파 의열투쟁의 의의

Ⅸ. 결론

본문내용

어 가고 있던 시기에, 침체상태에 있던 임정도 그러한 사조를 외면할 수 없었다. 때문에 국내의 우파세력의 대표격인 천도교와의 연계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병인의용대였다. 그렇지만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권위수호를 위해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反社會主義 이념 혹은 反共産主義를 견지하였다. 이를 위해 병인의용대에서는 1928년 8월 25일「가짜 러시아인들을 숙청 박멸하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반공의 기치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좌익단체인 在中國韓人靑年同盟 第1區 上海支部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동청년동맹에서는「帝國主義의 走狗化한 留?民族 파시스트의 정체를 폭로한다」라는 제목의 선전 유인물을 발표하여 병인의용대의 반공산주의 활동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1930년대 들어 임정의 의열투쟁 목표는 의열투쟁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협동전선을 꾀하는데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단행하자 반일적 분위기가 성숙되어 갔고, 임정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중국정부의 지원과 나아가 협동전선을 목적으로 의열투쟁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투쟁이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 의거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시키는 매개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일례로 1934년 3월에 있었던 康秉學의 ‘上海神社擲彈義擧’에 대해 한국독립당은「康義士虹口擲彈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면서, 이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협동전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1930년대에 들어 임정의 의열투쟁 목적은 친일파 및 주구에 대한 처단도 있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활용하여 중국을 본격적인 항일전선으로 끌어들이는데 주목적이 있었다고 하겠다.
1930년대 들어 조직적 대중운동과 무장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의열투쟁을 통해 임정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김구는 윤봉길 의거로 독립운동계의 거물로 부상하였으나, 이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구는 “혁명운동은 테러행동에 의하지 않으면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를 계속할 것”이라고 자신의 노선채택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임정의 의열투쟁은 여러 운동권으로부터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요컨대 몇몇 일본인과 친일주구를 처단한다고 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실행한 의열투쟁을 ‘우경 모험주의’로 간주하였으며, 이러한 파괴?암살 활동은 운동자를 희생시켜 개인의 명성을 높이는데 이용되었다고 보았다. 심지어 독립운동 전체 시각에서 볼 때는 악영향을 준다고 하였다. 또한 외교론 내지 준비론을 주창하는 측에서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은 승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지배를 더욱 강화시키고 경찰 통치를 보다 길게 연장시킬 뿐”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1930년대에 행해진 각종 의혈투쟁은 조직적 활동을 저해하는 측면도 있었으며, 많은 인적?물적 낭비가 있었다. 예컨대 윤봉길 의거는 임정으로 보아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였지만, 이로 인해 安昌浩?金德根?張鉉瑾 등 주요한 독립운동자들이 피체되었고, 독립운동자들에 대한 검거?수색을 강화시켰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의 주요 간부들은 일제의 검거?수색을 피해 상해의 프랑스조계를 떠나 南京?鎭江?杭州 등의 지역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는 등 상해라는 독립운동 근거지를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열투쟁의 의의로 가장 주목되어야 할 점은 임정이 이를 통해 자신이 활동하고 있던 중국에서 지속적이고 항구적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임정이 성립 초기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으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면도 있지만, 의열투쟁은 임정의 존재를 확인시켜 국내외에 독립운동 기관의 대표격임을 과시하여 자신의 입지를 확보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Ⅸ. 결론
일제가 1945년 패망하여 쫓겨나기까지 근 40여 년 동안,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나라가 병합 당할 때 매국에 앞장섰던 민족반역자를 비롯하여 민족지도자로 행세하다가 일제의 회유와 매수에 넘어가 변절한 자도 있는가 하면, 한민족의 말살을 획책하는 ‘황국신민’ 교육을 철저히 받아 일제의 관리나 주구가 되어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통상 ‘친일파’라고 한다.
한민족은 1945년 해방되고 나서 바로 ‘친일파’를 법에 의해 심판하였어야 하였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었던지 그 후 일제의 권력에 빌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자들은, 일본이 쫓겨난 마당에 심판을 받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었다. 그리고 나라 찾는데 앞장섰던 독립운동가들이 주체가 되어 새 나라가 건설되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동서 냉전 구조와 남북 분단 체제가 형성, 고착화되면서 한국은 그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고 이미 반세기를 지나쳐버린 것이다. 일제에 빌붙어 살았던 자들이 반공의 투사로 잽싸게 변신하여 새 나라의 주역이 되어 다시 이 나라를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던 사람들은 핍박받고 역사의 뒷켠에 웅크려 지내야만 하는 역사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친일파’는 대개 다음처럼 정리할 수가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래 1910년 일제가 이 나라를 병탄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완용?박제순?이지용 등 ‘을사 5적’이나 송병준?이용구 등 일진회를 비롯하여 일부는 일본에 빌붙어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협력하였다. 그들은 그 후 일제가 하사하는 작위를 받고 나라를 판 대가로 돈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의 관리가 되어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백작이 되어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들이 바로 식민지 1세대 민족반역자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있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민족은 독립을 외치었다. 그런데 일제는 그 후 민족분열정책을 도모하여 공작?회유를 통하여 많은 민족지도자들을 전향?변절시켰다. 이때 넘어간 지도자들이 최린?최남선?이광수?윤치호?이갑성 같은 자들이다. 이를 식민지 1세대 ‘변절 부일파’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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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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