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봉건제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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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봉건제도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 봉건제도란?

3. 주나라 봉건제도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4. 봉건제 탄생의 배경
-1) 은나라(상나라)의 멸망
-2) 봉건제의 형성

5. 주나라 봉건제도의 특징
-1) 성주성의 건설
-2) 제후봉건
-3) 천명사상
-4) 종법제도

6. 주나라 봉건시대의 사회와 경제
-1) 주나라 시대의 사회
-2) 정전제의 실시 문제
-3) 농민생활
-4) 경제활동

7.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다른 나라의 봉건제도와의 비교

8. 봉건제의 붕괴와 주의 멸망

9. 결론

본문내용

간의 관계에 있어서 주군이 귀족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귀족은 주군에 대해 전적인 충성과 의무를 행함으로써 유지된다. 여기서 봉건제의 이중성을 볼 수 있다. 귀족은 주군에게서 받는 토지가 전부가 아니다. 주군에게서 받는 토지는 봉토이고 이 외에도 상속한 토지, 매매하거나 매입, 개간한 토지가 있다. 즉 주군에게서는 받은 토지는 귀족 자신의 토지 중 일부인 것이다. 주군은 영지 내에서의 귀족의 불입권을 인정하고 약간의 토지를 줌으로써 귀족의 전적인 충성과 군사적 협조를 보장 받을 수 있고 귀족의 입장에서는 영지 내에서의 불입권과 경제적 협조, 그리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불입권과 이중 봉신제, 토지의 상속과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봉건제는 왕권을 약화시켰지만, 왕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까지 왕권이 미치도록 하며 일부의 토지로써 전적인 의무와 봉사를 요구할 수 있으며, 상속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주군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왕권을 확대하는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의 의회는 13세기 초에서 14세기 말에 출발하게 되는데 그 근원은 주군이 가신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지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한 곳에 소집하여 재판도 열고 사냥도 하는 등 모임을 가지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신의 입장에서는 주군이 자신들의 동의나 정당한 사유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인다거나 증액을 할 수 없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서양의 봉건제는 군사적 방위체제에서 출발한 자발적 조직이며 명확한 쌍무적 계약 관계에 근거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일본의 봉건제도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본도 전국시대까지 전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전쟁은 영주들 간의 전쟁이었고 외국과의 전쟁도 없었다. 일반 백성과는 거의 무관했으므로 한국처럼 왕조가 바뀌는 그런 전란과 내란은 없었고 계급사회의 급격한 변동과 계층사회의 이동도 있을 수가 없었다. 즉 계층사회의 변동이나 이동이 없었으므로 일본왕실은 2천년동안 한 핏줄로 유지되었고 쇼군이나 다이묘들에 의해 합의된 봉토 내에서 정치를 해왔다. 현재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도 이러한 계층 출신 후손들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일본은 일반적으로 막부 시절 이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쇼군이 집권하여 막료들에게 봉토를 준 것이 아니고 지방 영주 다이묘(大名)의 반란이나 배신을 항상 염려하게 되었고 이를 무마하기위하여 다이묘들에게 봉토를 주었다. 사실상 준 것이 아니고 기존 소유를 인정해 준 것에 불과 하며 다이묘의 자식들을 막부에 인질로 보내 반발의 소지를 억제시켰다. 즉 기존 지방 영주들을 규합하여 봉건국으로 만든 셈이다. 이 방식은 중국 봉건제후와 다소 다르지만 서양 영주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본은 엄격한 신분제도는 무사계급, 유학자 계급, 농민, 상업종사자, 공업종사자 등 4등급의 분류하여 엄격한 신분제도를 확립하였다. 특히 이 계급 중 상공인인 죠닝(丁人)계층은 아무리 다이묘라도 죠닝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과 할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상공인의 부흥이 지역사회 발전이고 나아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 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사고 구조이다 이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의 근대화 기틀이다. 일본은 이러한 봉건제도와 계급사회가 확고하게 정착되다 보니 정권변동은 있었으나 계층 이동과 계급사회의 변화 나 이동은 없었던 나라로써 봉건 제도가 확립되어 현재까지 일본식 지방 자치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8. 봉건제의 붕괴와 주의 멸망
제후국은 다시 그 주변으로 확대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주변의 미개한 종족을 포섭하거나 동화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병합하고 또한 인구증가에 따른 황무지 개간 사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갔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제후국은 자신의 부를 쌓아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중앙에서 아주 멀리까지 제후국들이 확대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관계는 약해지게 되어서 종법 제도에 의한 제후국의 통제는 어려워지고 제후국은 점차 주의 황실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제후국 사이에 힘의 우위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주의 봉건제도는 붕괴한다.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았다. 주 왕실은 도읍 을 동쪽으로 낙읍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를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이 때부터를 동주, 그 이전의 시대를 서주 시대로 칭한다. 동주는 다시 춘주와 전국으로 나뉘어져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는데, 춘추시대는 공자의 책명"춘추(春秋)"에서 전국은 전한시대의 저술인 "전국책(戰國策)"에서 따온 이름이다.
주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제후국들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제후국들이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우위를 다투는 춘추전국시대로의 진입하게 된다. 서주의 멸망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왕은 포사라는 후궁을 몹시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보로 봉화가 올려졌다. 다급해진 제후들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도읍으로 달려 왔으나 오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넋 빠진 모습이 되었다. 이를 본 포사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다시 보기를 원했고 자꾸만 봉화를 올렸다. 거듭 속아왔던 제후들은 정작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주왕실이 위기에 닥쳤을 때는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9.결론
이렇듯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중국땅에 처음으로 나타난 봉건제도였고, 주나라의 사회, 경제적 다른 상황들과 함께 봤을 때도 중국 역사상 큰 의미를 가진다. 그것뿐만 아니라 서양의 봉건제도, 일본의 봉건제도 등과 함께 비교했을 때, 세계사적인 면에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나라가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봉건제도의 법들은 주나라를 통치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공자가 주나라의 문물제도를 찬양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때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문물은 철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사이트
마르크 블로크『봉건사회2』
백양 『맨얼굴의 중국사』
http://myhome.naver.com/sw016/f-00.htm 이성원-역사자료
http://history.wonkwang.ac.kr/school/west/ 원광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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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08
  • 저작시기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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