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에 대한 심층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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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윤치호에 대한 심층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의 실력양성론
1. 안창호의 실력양성론
2. 이상재의 실력양성론
3. 윤치호의 실력양성론

Ⅲ. 흥업구락부와 윤치호
1. 흥업구락부의 성립배경
2. 윤치호와 흥업구락부

Ⅳ. 1938년 이후 윤치호의 친일논리
1. 윤치호의 내면논리
2. 일제의 파쇼정책

Ⅴ. 맺음말

참고자료

본문내용

는 독립운동단체의 성격보다 서북계 인사들로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기호파의 파벌단체로서 기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윤치호는 기호파와 서북파 사이의 파벌투쟁을 매우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서북파 인사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은 자제한 것 같다. 그는 평양 출신의 사위를 맞아들였으며 1929년 3월 12일
신흥우, 유억겸, 김활란 등의 분개에도 불구하고 수감된 안창호의 석방을 위해 당국자들과 접촉하는 모습 1932년 7월 15일
, 신흥우와 여운형이 "서북파의 비양심적인 음모와 계획을 분쇄하기 위해 충직한 기호인들로 구성된 결사를 만들자고 제안"하였을 때, 윤치호는 "일본인들에게 조선인들의 분열을 활용할 기회를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답한다. 1931년 10월 4일, 6일, 8일
또한 신흥우, 유억겸 등은 대화조차 꺼리는 수양동우회 핵심인사인 이광수와의 교우도 계속된다.
윤치호는 이상재 사후 흥업구락부의 회장을 맡았다. 흥업구락부 검거 이후 사상검사의 심문에서 "이 단체가 독립운동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뒤이어 자신이 1919년 경성일보에 독립운동 무용론을 피력한 것과, 지난 14년간 자신이 흥업구락부에 가입시킨 회원이 전혀 없다는 것, 동지회 지원을 목적으로 한 신흥우의 출자요청에 자신은 거부하였다는 변론을 통하여 "아무런 정치적 의도 없이 이 단체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한다. 1938년 8월 31일
윤치호가 사상검사에게 흥업구락부가 독립운동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 것처럼 실제로 흥업구락부 회장 윤치호는 흥업구락부를 독립운동단체로서 운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윤치호의 실력양성론은 문명국의 지도, 즉 좋든 싫든 일본의 지배 하 실력양성을 추구한다. 윤치호의 실력양성론은 아주 점진적인 것이다. 윤치호는 독립을 위한 급격한 운동에 대해서 경계한다. 사실 경계라기보다 공포와 혐오가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윤치호는 준비되지 않은 저열한 조선민중을 목도하며 한층 더 신중히 점진적으로 개화해 나갈 것을 생각한다. 윤치호에게 조선민중은 아직 독립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며 개화되지 않은 상태의 독립은 무의미하다. 독립은 윤치호에게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2100년경이면 조선 역시 문명국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처럼 독립이 자신의 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당위성을 갖지 않았다
따라서 회장 윤치호의 이러한 사고 아래 흥업구락부가 급격한 혹은 활발히 일제 탄압의 칼날 위를 걷는 사업을 벌일 수 없었을 것이다. 신흥우의 적극신앙단 주도 역시 윤치호의 이러한 사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Ⅳ. 1938년 이후 윤치호의 친일논리
1. 윤치호의 내면논리
윤치호가 받아들인 기독교는 사회 참여적 성향보다 개인적인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였다. 즉, 그러한 논리는 개인적인 인격수양을 국가나 민족의 독립보다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점진적인 실력양성운동의 바탕이 되었고 독립을 전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식민지배 하에서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한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이라는 논리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1938년 이전에 회색인으로 존재하게 된 내면적 이유가 되었다.
2. 일제의 파쇼정책
30년대 일본의 사상통제가 이루어지면서 일제는 신도를 강요한다. 윤치호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1943년까지 변함없이 강도 높게 비판을 한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사상통제 정책을 통해 종교 세력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것은 신사참배강요와 기독교의 일본화시도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국내 정세는 기독교자들에게 전향 또는 순교라는 결단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그 내면이 어떻든지 간에 행동으로 전향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적극친일이라고 평가받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Ⅴ. 맺음말
윤치호를 비롯한 당시 기독교계 신 지식인층들의 친일 논리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를 든다. 윤치호에 대한 기존의 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 연구는 기존의 연구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윤치호의 내면사상을 모두 규명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을 하여 연구를 진행해 나갔다.
윤치호의 내면을 살펴보는 1차 사료인 일기를 바탕으로 그가 처한 상황과 받아들인 사상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윤치호만의 사상이 성립되는 과정을 알 수 있었고 그가 가진 내면세계의 논리구조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다. 흥업구락부를 통해서 그가 가진 실력양성론이 어떻게 실현이 되었는지 혹은 윤치호의 흥업구락부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그의 사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확인 할 수 있었다. 개인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윤치호의 실력양성운동은 개인의 실력양성을 가장 우위에 두고 있었으며 따라서 독립은 그에게 실력양성이후의 목표 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 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철저히 개인의 실력양성만을 중시한 그의 운동은 매우 점진적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친일이라는 결론으로 도달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일제의 강압정책이라는 급변하는 정세에 따라 윤치호는 기존의 회색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행동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친일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의 사상마저 재고의 여지없이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앞서 살펴본 것 과 같이 윤치호의 개화기부터 일제시기까지의 사상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성립이 된 것들이다. 즉, 그의 기독교에 기반을 둔 실력양성론이 결국 친일이라는 결론을 도달했을지 모르나 그 사상에는 민족을 위하는 그 나름의 논리가 분명히 존재하였다.
참고자료
유영렬, ‘개화기 윤치호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1984.
장세윤, 「실력양성론자에서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무크 · 친일문제연구』 , 가람기획, 1995
국사편찬 위원회,『윤치호 일기』3권, 1974
http://www.naver.com 백과사전
김상태, ‘일제하 윤치호의 내면세계 연구’, 역사학보, 역사학회, 2000.
유영렬, ‘개화기 윤치호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1984.
이희환, “윤치호의 개화사상-그의 기독교신앙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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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15
  • 저작시기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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