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교육계몽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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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재필의 생애

2. 서재필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상

3. 서재필과 독립신문

4. 독립신문의 한계점

5. 서재필과 독립협회

6. 독립협회의 한계성

7. 서재필의 교육계몽운동

8. 교육계몽활동의 한계

9. 맺음말

10. 참고자료

본문내용

여의사와 간호원의 역할을 알리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여성교육기관은 외국인에 의한 것으로서 정부에서나 개화사상가들도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노력하였고 또 직접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남자들의 교육에 관한 것이었고, 여성교육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여성교육이 외면당하고 있을 때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관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주장(독립신문, 1896년 5월 12일, 논설.)하고 있으며 남녀차별의 관습을 비판하고 남녀 본래의 평등권을 주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도 남녀가 평등하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영향으로 여성에 대한 가치관이 점차로 변화하게 되었을 때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독립협회의 주장을 통해서 였다.
8. 교육계몽활동의 한계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의 교육계몽과 사회변혁운동은 첫 번째로, 교육의 서양화를 낳게 되었다. 서양화란 교육 내용에 있어서 철학, 윤리, 문학 등의 인문과학에 있어서도 책을 통한 독서와 사고 중심에서 기재를 통한 실험이나 실습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교육의 기능화의 결과이다. 교육의 기능화는 교육내용에서 인문과학을 경시하고 자연과학만을 중시하게 만들었고, 교육대상에서 교육의 질이 무시되고 교육의 양만이 중시되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이 국가발전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인식에 기초한 서재필의 교육 개혁적 주장은 교육의 사회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정치나 경제가 그렇듯이 교육도 사회의 여러 기능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국가나 사회가 어떤 것을 절실히 요청할 때 그 필요성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을 인격 수양이라고 보았던 전통 위에 교육은 사회발전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기능주의 사상을 심어 놓게 되었다.
사회개혁과 교육개혁은 서로 종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관계 또는 사회의 요구를 교육이 직접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간접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는 근본적인 자기변혁이 시기와 장소에 동일하게 작동될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교육을 통한 변혁은 여타의 영역과 동일하게 외세가 개입되어 외세에 의해 외세를 위한 변혁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자기로부터의 한계가 너무나 극명하다. 교육개혁은 교육의 특성이나 교육적 환경을 고려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회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반영시키는 일차적인 사회개혁의 종속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개혁이 사회개혁의 종속관계로 인식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교육개혁이 교육적인 여건을 고려하기보다는 교육 외적인 사회적 요구를 직접적으로 수용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교육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9. 맺음말
개화기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변화가 많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개화사상은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화를 실천하는데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국민들의 일상과는 상당한 괴리를 주는 의식 개혁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각종제도의 개혁과 국가권력의 부정적인 권력행사에는 고발되어지고 표현되어지는 구제도의 잔존과 새로운 제도와 이념이 시도되어지는 과도기적인 매개물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이 동시에 경험하는 서양의 충격에 의해 가속화되어지는 봉건체제 해체기에 실사구시의 사상이며 민족적이며 민주적인 도입이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화파들은 편협한 토대를 드러내고 만다. 상당수의 개화파들과 서재필은 사회개혁의 실패를 교육개혁으로 완성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서재필의 교육관은 교육이 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기술과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는 결과적으로 자기가 부정되어지는 동양학문의 정신적 전통도 부정한다. 초기 개화주의자들이 서양 기술의 원류는 동양에 있었는데, 다만 동양은 그것을 실용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며, 생명과 의리의 학문인 정신문화는 동양 것이 우수하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서재필은 동양의 기술문명뿐 아니라 정신 문화까지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나선 1896년은 고립정책인 쇄국주의를 벗어나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지 2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조선은 아직도 종래의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게다가 서구열강들의 세력침투로 몹시 혼란된 사회였다. 이럴 때 서재필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서 국민들의 지식과 교양을 계몽하고 애국애족정신과 자유민주주의사상 및 근대국민국가의식을 서서히 주입시켜 나갔다. 서재필과 독립협회 회원들의 국민계몽 활동은 일반국민들에 의해서 크게 환영을 받게 되었다. 권리와 의무의 용어조차도 국민들은 알기 쉬운 국문으로 된 독립신문을 통해 권리와 의무를 알게 되었고, 자유주의 민주사상을 알게 되었다. 개화파의 국민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국민계몽운동과 개혁을 통한 사회운동은 완전한 성공과 실패도 아닌 동화를 위한 정책적인 선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첫 번째는 對일본관계의 부적절한 관계설정이다. 두 번째는 지주제에 대한 옹호 내지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청사진이 결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는 여전히 지배층에 대한 논리전개라는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忠君사상이다. 네 번째는 상류엘리트에 국한된 제한된 변화가 모색되었다는 점이다.
서재필은 전통적인 모든 사상과 단절하고 문명화된 서구의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을 수용해야만 조선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오늘날과도 유사한 세계사적인 문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관계망의 확보가 정보의 소통성과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1890년대 이후의 오늘의 우리에게 부과되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었으며 이 담론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과 의식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접했던 것은 사실이다.
10. 참고자료
이정식, 서재필-미국 망명시절, 정음사
이민수, 한국의 근대 사상, 삼성출판사
서재필,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 가격1,4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8.01.21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7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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