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답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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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경복궁
Ⅱ. 영역
1. 광화문(光化門) ~ 흥례문(興禮門)
2. 흥례문(興禮門) ~ 근정문(謹正門)
3. 근정전(勤政殿)
4. 사정전(思政殿) 영역
5. 경회루(慶會樓) 영역
6. 강녕전(康寧殿) , 교태전(交泰殿) 영역
7. 자경전(慈慶殿) 영역~향원정(香遠亭) , 집옥재(集玉齋)
Ⅲ. 해방 이후의 경복궁
Ⅳ. 결론

본문내용

가 조선 통치를 시작한 지 5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조선물산 공진회’라는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이다. 이 때 광화문 뛰쪽 홍례문은 이미 파괴되고, 일제가 조선 왕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의도로 왕의 집무공간인 근정전 앞에 고래뼈를 전시하기도 했으며 근정전은 총독부 건물에 완전히 가로막혀 각종 행사의 개회식이나 폐회식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근정전 옆에 돼지 우리와 화장실 정화조, 가금(家禽)류 전시장 등을 설치하고 경복궁 전체를 공원화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되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지만 반대여론에 부딪혀, 1927년 9월 광화문을 건춘문 쪽으로 옮겨 버린다.
또한 1929년 5월에는 신무문 북쪽에 있던 융무당, 융문당 등을 헐어 한강변 용광사 건물을 짓는데 쓰기도 한다. 같은 해 10월 시정 20주년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어 경복궁이 또 한 번 크게 훼손되고 만다. 1932년 10월에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이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로 팔려나기도 했다. 1935년에는 건청궁을 헐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 병탄 25주년 박람회장을 만들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으로 헐려나간 무수한 전각들은 방매되어 일본인들의 사저 등으로 이용되었고, 전각이 있던 빈자리에는 궁궐과 관계없는 불탑, 사리탑 등이 채워지게 된다.
Ⅳ. 결론
이상으로 경복궁 답사에 대한 감상과 이해를 서술하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궁궐 곳곳의 조형물들과 전각 배치들, 거기에 부여 된 이름들까지 어느 하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상징성 중에도 경복궁의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왕실의 권위와 위엄일 것이다. 따라서 일제 해방 이후 가장 많이 훼손을 겪은 부분도 바로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의미’ 또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경복궁은 총독부 건물을 해체한 이후 경복궁에서는 많은 복원작업과 행사들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의 경복궁이 우리에게 궁궐로서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하지만 그 복원과 유지에 있어서 단순히 옛 모습을 찾고 폐쇄하고 닫아 놓아 보존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번 답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경복궁이 남아있는 존재 가치를 올바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복궁의 관리와 복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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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8.08.11
  • 저작시기2008.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7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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