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천안문사태로 인해 야기된 중국의 문화적 상황변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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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4 천안문사태로 인해 야기된 중국의 문화적 상황변화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6.4 천안문 사태를 포함한 중국 현대사
2. 연구의 필요성 및 방법

Ⅱ 본론
1. 6.4천안문 사태의 개황
1.1 천안문 사태의 발생원인
1.1.1 발생배경
1) 경제적 상황
2) 정치적 상황
1.1.2 전개과정
2. 천안문 사태 이후의 중국의 문화적 상황변화
2.1 천안문 사태의 결과 및 영향
2.1.1 정치적 차원
2.1.2 경제적 차원
2.1.3 국제관계
2.2 사태 이후의 중국의 문화적 변화
2.2.1 1989년 직후
2.2.2 1992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천명 이후
2.2.3 강택민 집권 이후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iscal Decline: The Paradox of Fiscal Decentralization in Post-Mao China," The China Quarterly, No.128(December 1991) 참조
이를 위해 등소평은 지방정부와 기업 모두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여 인센티브의 부여를 통한 생산성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런 분권화 정책은 경제 부문에서는 80년대 중반 들어 그 성과가 쇠퇴하게 되는 농업개혁을 제외하고는 크게 기업으로 하여금 그들이 벌어들인 이익을 취할 수 있게 하고 손실부분에 대해선 책임을 지도록 하는 ‘기업개혁’과 재정권을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 이양하는 ‘재정개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김성한, “분권화의 정치경제, 중국의 분권화 개발전략과 분열잠재력” 『계간사상』 (사회과학원, 1993.가을) p.108-109
이를 통해 지방정부와 기업은 자율적이고 효율적인 생산과 경제성장을 도모하였으며 이가 오늘날의 커다란 성장을 낳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런 분권화 정책은 거시적 통제기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중앙과 더 많은 자율권을 요구하는 지방간에, 또 분권화를 통한 성장의 과실을 입은 지역과 혜택을 입지 못한 지역 간에 심각한 갈등을 낳게 되는 바 이는 분권화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인 것이며 본 주제와 관련해서도 지역 간 격차심화의 주요한 정치적인 요인으로 기능하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2.2.3 강택민 집권 이후
강택민의 지도하의 신 지도체제는 출범초기부터 등소평 노선을 계승하여, 현대화 건설을 국가의 가장 주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 개방을 계속해서 추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화를 위한 경제개혁의 지속적인 추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1당 독재의 부정정치와 민주화를 포함한 전면적인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를 증폭시킬 가능성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3세대 그룹의 지도자인 강택민의 경우, 정치개혁에 대한 의지는 있었으나, 획기적이고 전면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다원적인 정치체제를 도입하게 되면, 이는 1원적인 1당지배제와는 대립되며, 이는 자칫 정권의 존립기반의 붕괴를 초래할 위험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즉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한 정치제도의 개혁은 단행할 수 있었지만, 공산당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는 정치체제의 개혁은 단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류동회,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2004년 도서출한 한울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민주화의 용어에 대한 해석 역시, 서구식의 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제도와 절차상의 민주화의 의미라는 자의적인 해석과 적용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즉 강택민은 사회주의 1당 독재 체제를 견지한 동시에 개혁, 개방의 지속적 유지 속에서의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고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강택민의 경우, 소련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역적이 되었지만, 전 세계 시민들에게는 시대의 여망을 열었다고 칭송 받는 고르바쵸프의 절차를 밟느니, 다소 미흡하며,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공산당의 유지 속에서 그들만의 영웅이 되기를 갈망했다고도 볼 수 있다.
Ⅲ 결론
천안문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이 죽어버렸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많은 운동가들 (陳子明 徐文立 王希哲 沈良慶 王丹 王有才 등)은 형무소를 들락날락 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계속 하였고, 魏京生은 1993년 초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인권문제로 정부를 비판하다가 재구속 되었다. 미국 및 서방세계의 압력으로 석방된 후 1997년 신병치료의 명목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어 지금은 뉴욕에서 민주화 운동을 위한 잡지 <北京之春>을 발행하고 있다.
당국은 특히 처치 곤란한 운동가들을 신변치료의 명목으로 가석방하여 미국으로 추방하였는데 미국에 망명한 운동가들은 1998년에 中國民主黨을 결성하여 王若望을 당수로 추대하는가 하면 自由中國聯合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王有才가 야당인 '中國民主黨'을 결성하자 관계자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같은 해 운동가들이 조직한 '中國發展聯合會'는 북경에서 제1차 전국대회를 열기도 했다. 조자양 총서기의 일급 참모 였던 포우(鮑尤) 는 1999년 당 간부들에게 천안문 사태는 당의 실책이었음을 인정하라는 공개장을 보냈다. 앞으로 전기 [The Tiananmen Papers]의 중국어판이 나온다고 하는데 편자 Zhssang Liang이 말 하기를 동문서를 출간하는 목적은 당이 덮어 버린 천안문 사건의 뚜껑을 다시 얼어 진실을 밝히고 당 자체에 의한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민주화는 집권세력에 대한 투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개방과 시장경제의 침투 자체가 기성의 체제이념을 무력화 하는 또 하나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는 것이다. 등소평의 경제개혁이 크게 성공하여 중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등소평이 제시한 막스-레닌 및 모택동 사상 견지의 원칙이 이미 사문화 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중국 공산주의는 이름 뿐 이고 지도부 자체가 맑스-레닌주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다만 그것을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패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지금의 변화의 방향 즉, 국제화, 정보화, 민주화의 방향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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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興鎬 中蘇硏究. “國有企業改革和體制安定”, 제23권 4호, 2002년 2월
金樂熙 國際問題. “江澤民과 中國의 政治體制”, 1997년 12월
김하룡 장현표 新중국정치론. 나무와 숲, 2002년
제임스 왕 현대 중국 정치론. 도서출판 그린, 1997년
김영화 강택민과 중국정치. 문원, 1997년
김영화 등소평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 문원, 1995년
서진영 鄧小平死後 中國政治體制와 權力構造의 變動展望. 고려대학교
편집부역, 강택민과 이붕, 도서출판 인의, 1990년
양중메이, New china Leader 후진타오 , 한국경제신문사 2004년
류동회, 그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2004년 도서출한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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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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