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화 고찰(17~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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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의 문화 고찰(17~18세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17~18세기 전반 실학의 대두와 발전
1) 17세기초 서울 ‘실학’의 대두
2) 17세기 후반~18세기초 실학의 발전

3. 18세기 후반 ‘북학’의 대두

4. 철학·종교의 새 경향
1) 수련도교와 양명학
2) 호락논쟁

5. 국학 및 과학의 발달
1) 역사 편찬
2)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
3) 국어학·금석학·유서의 편찬
4) 과학과 기술의 발전

6.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1) 문학의 변화
2) 미술의 새 경향
3) 음악의 새경향

7. 맺음말

본문내용

그들의 구상이 민족의식문화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국학의 진흥에도 관심이 지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언어강토역사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 우리의 언어, 즉 한글에 대한 연구는 문자음운문법어휘 등의 분야에서 일정한 업적을 남겼다. 한글의 연구와 아울러 한글로 된 서적들이 다수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한글에 대한 우수성에 대한 인식, 즉 문화적 자아의식의 발현이라 하겠다.
자아의식, 민족적 자각은 국토의 자연환경, 자원의 분포, 인구와 취락, 자연보호 등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우리의 영토연구로 승화되었다. 그리하여 각종의 지리지지도읍지 등이 간행되었다. 즉 정상기의 《동국지도》, 김정호의 《청구도》《대동여지도》는 정밀성과 아울러 실용성에서도 돋보였다. 지리지연구에서는 이중환최한기김정호한백겸 등의 노력이 이바지한 바가 컸다. 이 시기에 특이한 것은 읍지(邑誌)의 편찬으로서, 이는 조선 후기 지리학의 최대 성과라 하겠다.
공간성에 대한 관심이 지리학이라면, 시간성에 대한 관심이 역사학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역사의 방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의 체계화와 역사무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어 국사가 체계화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각 시대에 대한 인식도 심화되어 단군조선고구려발해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학술이 진흥하고 국학이 발달하면서 백과전서학(百科全書學)이 수립되었다. 이는 흐트러진 제도를 정비하려는 개혁의지의 소산이었는데, 처음에는 이수광이익이덕무이규경 등 개인 차원의 노력이 중심이었으나, 영정조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백과전서가 편찬되었으니, 그 결실이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등이다.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실학자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의 과학기술은 본래 유교이념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고 있었다.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서 과학과 기술이 요청되었다. 예컨대 천문역법이 그것이었다. 유교국가에서는 농정(農政)이 기본과제이었고, 농정을 잘하기 위해서는 천문역법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서는 서양의 과학기술이 전해져 이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졌다. 천리경을 비롯한 서영의 천문기기가 도입되었고, 서양의 역법을 익혀 시헌력이 채택되었다. 천문역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주관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져 지구구형론(地球求刑論)과 지구회전설(地球回轉說)이 제시되었다. 그 밖에도 지리학수학의학 등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의 특징은 한마디로 서양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아 세계관의 변화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 인식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과학적 안목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에는 홍대용정약용최한기 등의 역할이 컸다.
의식의 확대와 현실에 대한 인식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1516세기에 있어서의 문학과 예술은 거의 지배층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있어서의 민중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었으나 그러한 삶은 거의 주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후에는 사정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17세기 이래의 사회적 변동은 종래의 이념제도문화의 균형을 뒤흔들면서 새로운 문학의식예술성향창작유통의 방향을 조성하였다. 이 시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삶의 질적 향상은 서민들의 의식을 일깨웠으며, 그들의 재능과 취미를 계발시킬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조선 후기 문학계의 변화에서 주목할 양상은 국문학의 성장이었다. 한문이라는 문자상의 제약 때문에 문학적 욕구의 구현이 어려웠던 서민층에서 국문학의 성장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 결과로서 辭說時調가 유향하였고, 다채로운 양상의 가사가 창작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공상적인 세계보다는 현실의 서민세계가 중심이었고, 작품의 주인공들도 영웅 중심에서 서민적 인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예컨대 사설시조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민중들의 생활형태나 적나라한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였는가 하면, 기탄없는 비유를 통해서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사회비평적 의미를 가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전국 각지에 도시적 생활공간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와 같은 놀이패가 발달하기도 하였다. 판소리는 광대들이 한 편의 이야기를 가창과 연극으로 연출하여서 읽는 소설보다 훨씬 흥미를 돋우었는데, <춘향가><심청가><홍보가> 등은 매우 인기 있는 판소리 작품이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먼저 회화부분에서는 산수화와 풍속화가 발달하였는데, 정선(鄭敾)은 우리 나라의 자연을 그려내는 데에 알맞은 구도와 화법을 창안해 냈으니 이른바 진경산수화라는 화법이다. 풍속화에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각기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한편 조선 후기 회화에 있어서 주목된 현상의 또 하나는 민화의 유행이었다. 대개 무명작가에 의해 그려진 민화는 격조가 뒤떨어지지만, 파격적인 구성과 화려한 색채가 특징적이었다.
한편 음악의 경우는 아악을 중심으로 한 궁중음악이 쇠퇴한 반면에 민간 음악이 서민사회의 풍류문화 보급과 관련하여 새로운 양상으로 성장하였다. 즉 가객과 풍류객들이 대두하면서 가곡가사시조 등과 같은 풍류음악이 유행하였고, 광대들에 의해 판소리와 같은 공연예술이 발달하였다. 음악과 함께 춤도 발달하였으니, 특히 민중의 생활환경을 토대로 한 민속무가 나름대로 발달하여 민중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은 그것이 조선 후기 민중의 성장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회변동 속에서 삶의 질을 추구한 서민사회는 자신들의 삶이 현실세계와 깊이 관련이 있다고 의식하면서 현실세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문학예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즉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은 곧 민중의식의 반영이었다.
참고문헌
-《한국사35》,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2003)
-《한국사10》, 강만길 外, 한길사(1994)
-《다시찾는 우리역사2》, 한영우, 경세원(1998)
-《한국사 입문》, 신형식,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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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28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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