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의 권력구조와 영도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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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중국 공산당의 권력구조와 기능
1). 중국공산당 중앙조직
2). 중국공산당의 지방조직
2. 당의 지도원칙과 개혁개방기 중국공산당의 개혁
1). 당의 일원적 지도를 위한 장치
2). 개혁개방기 중국 공산당의 개혁
3). 개혁개방의 심화와 보혁갈등

Ⅲ. 결론

본문내용

까지 계속되었다. 레닌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의 지도원칙은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사안이므로 변화할 수 없는 것으로 보지만 구소련.동구권 국가들의 경험은 레닌주의 정당도 체제의 행정적 경제적 효율을 증대시키기 위해 그들의 역할을 재조정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레닌주의 정당의 역할 변화에 대해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론적 논의를 하고 있다.
헌팅턴은 당의 정책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이처럼 복잡한 사회의 효율적 운용은 사회세력들의 직능적 자율권 증강과 정치적 권위 증강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 당 지도자들은 권력의 분산을 추구하면서 당외집단에게 보다 많은 자율권을 허용하지만 이런 변화는 당의 정치적 패권에 위협이 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헌팅턴이 당의 역할 변화를 사회경제적 변화의 불가피한 결과로 본 반면, 조윗은 당의 역할 변화가 당의 선택임을 강조하였다. 조윗에 따르면 레닌주의 체제는 점증하는 사회적 다양성이 정치이데올로기 상의 다양성으로 발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회와의 관계를 고립에서 통합으로 재조정한다. 그 결과 체제의 구조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특히 당은 組合主義를 통한 포용정책을 채택, 다양한 사회조직들과의 협의를 중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사회 정치적 변화에 대한 체제의 단순한 반응이라기 보다 오히려 자신의 발전정책이 낳은 사회적 결과들로 하여금 사상적, 조직적으로 당의 규정에 부합되는 정체성을 계발하도록 하기 위한 노력임을 강조한다.
이 두 학자들은 당의 역할 변화에 대해 서로 다른 분석을 제시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변화의 초점을 당과 당외 조직 세력간의 관계 재정립에 맞추었다는 점이다.
3). 개혁개방의 심화와 보혁갈등
중국 공산당은 1989년 64 천안문 사건 직후 조자양 총서기를 축출하고 강택민을 임용한 제 13기 4중전회부터 대내외적 곤경을 극복하기 위한 당지도부의 결속과 안정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 경제정책의 방향, 서구 세계의 공격에 대항하여 사회주의 체제이념의 강화,지도부의 세대 교체와 관련하여 이른바 보혁갈등을 지속하였다.
1989년 이전의 중국 공산당내의 개혁파, 보수파는 양자가 명확하게 구별되는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결집된 정치실체가 아니라 대부분 특정문제정책에 대한 입장이나 사적인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한 “人脈”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1989년 이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제반 정책의 결정집행 과정에서 비교적 선명한 대조를 보이며 보혁갈등을 보였다.
1989년 천안문 사건 직후 시종 열세에 처해있던 당내 보수세력의 입지가 강화되어서 당내 인사변동, 경제정책, 사상정치 등 주요 분야에서 보수세력의 주장이 대폭적으로 반영되었다.
중국 공산당 제13기 4중전회에서 민주화 시위 당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개혁개방 정책의 선두주자였던 조자양이 추출되면서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보혁갈등이 첨예화되었다. 개혁세력은 개혁개방정책을 더욱 심화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며 보수세력은 개혁개방정책의 축소와 농업부문의 강화, 경제부문의 중앙통제중앙집권화를 강화할 것으로 주장하였다. 4중전회부터 7중전회의 시기까지는 비교적 보수세력의 입장과 주장이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7중전회를 전후하여 강택민 총서기가 경제특구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중국의 特區정책을 보다 강화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개혁세력의 주장이 다시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개혁개방 정책의 확대 심화는 서방의 <和平연변>전략이 중국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개혁개방정책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일부영역에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대체함으로써 사회주의 전반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보수세력의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혁개방에 대한 등소평의 강조 및 개혁세력의 당내 입지 강화에 힘입어 1991년 전반기에는 대체로 개혁세력의 기본입장이 단계적으로 관철이 되었다. 하지만 1991년 소련과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 공산당은 보혁갈등을 재연하게 된다. 보수세력은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체제위기 극복을 위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요 부문 영도권 장악과 反자산계급자유화 투쟁 강화, 경제부분의 개혁 축소, 국영기업의 주도적인 지위 확립 등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등소평을 위시한 개혁세력은 현재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이룩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개혁개방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4 천안문 사건 이후 계속된 당내 보혁갈등은 1992년 등소평의 <南巡講話>를 계기로 일단 개혁세력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등소평은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의 강화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은 강택민이 등소평의 뒤를 이어 더욱 강화시켜나가면서 현재까지 이르렀다.
Ⅲ. 결론
이처럼 중국의 지도체제는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유지되어 온 전통에 따라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정한 역할과 권력을 분담하는 상호분업적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정치국 상무위원회 구성원들이 국무원 총리, 전인대 상무위원장, 정치협상회의 주석, 기율검사위원회 주석 등 지도적 직책을 겸직하는 분업적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룩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7명에서 9명으로 확대된 것은 집단지도체체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으로써, ‘人治’의 정치문화가 강한 중국에서 이들 최고엘리트에 대한 연구는 향후 중국 공산당의 진로에 대한 전망을 용이하게 해줄 것이다.
참고논문
박두복 “중국 공산당 제 16차 전국대표대회와 중국공산당의 성격변화 전망”
김재철 “레닌주의 체제에서의 당의 영도원칙의 이론과 실제”
김재철 “모택동 이후 중국 공산당의 개혁:당의 재정립을 중심으로”
문흥호 “중국지도부의 보혁갈등의 전개추이와 14전대회”
장송자 “중국개혁정치 하의 당의 기능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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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12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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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8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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